물리학자인 '나'는 수상한 비밀 연구소에 취직하게 된다. 연구소는 영혼과 사후세계를 연구하는 곳이다.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회 각계각층 인사 기부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데 내가 연구해야 할 것은 유령 존재가 아니다. 유령 존재는 이미 증명됐다는 것이다. 나는 비밀 연구소에서 죽음 이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조우하게 된다.
이산화 작가의 작품집 '증명된 사실'에 수록된 표제작 '증명된 사실' 일부다. 이산화는 음모론적 설정을 즐겨 사용하는 작가다. 그의 소설에는 비밀스러운 배후 조직이나 외계인 따위가 자주 등장하고 그들 음모에 따라 세상 비밀은 은폐된다. 구름 외계인, 죽음 연구소, 포악한 살인 펭귄 무리 등등. 그가 댄 브라운과 같이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고 그 믿음을 소설로 간증하는 스타일은 단연코 아니다. 이산화는 음모론적 설정의 고유한 재미 자체를 즐기고 활용할 줄 아는 작가다.
음모론적 설정에 어떤 재미가 있냐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의 이야기를 해 보자. 백신이 개발됐다. 지긋지긋한 역병과 완전히 작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끝의 시작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 의견이 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백신 개발은 절대다수 사람이 기쁜 일이라 생각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팬데믹이 수많은 음모론의 단골 게스트인 거대제약기업 기획이라는 이제는 식상한 클리셰로 이야기는 시작됐다. 거대제약회사 뒤에 무시무시한 권력을 지닌 악한 세계정부가 있다.
세계정부는 팬데믹으로 인구를 통제하고 백신으로 돈까지 벌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통제를 조금 더 살펴보자. 오래전부터 존재가 알려졌던 싼 약물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 효과가 있는 치료제인데도 이윤이 남지 않으니까 일부러 뭉개버렸다는 말도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혈관에 표백소독제를 투입하면 치료 효과가 있을 거라고 말한 도널드 트럼프가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 신의 선물이며 매우 안전한 치료제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음모론은 도널드 트럼프를 신격화하면서 백신에 투자한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빌 게이츠가 백신에 액상으로 된 회로를 넣어 사람을 통제한다는 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빌 게이츠가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선두이자 세상의 모든 순수악이 결집된 화신처럼 여겨진다. 하긴 미국의 소위 안티 백서는 그 슬픔으로 점철된 역사가 유구했으나,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에도 반(反)백신 음모론이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목격했던 수많은 블루스크린 원한이 뭉치고 뭉쳐 마침내 어떤 실체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음모론에 대한 확신은 그 속의 적나라한 모순을 인지할 수 없게 만들 정도다. 예를 들면, 팬데믹으로 세계 국가의 성장률을 으깬 다음에 백신으로 돈을 버는 것은 농사가 잘 되고 있는 논밭을 뜬금없이 불태운 다음 그 위에 화전을 경작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 아닌가? 영광스러운 재선 실패자 도널드 트럼프는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옹호했으나 정작 자기가 병에 걸렸을 땐 스테로이드와 항체 치료제를 맞지 않았나?
나는 이런 음모론이 인간은 결코 복잡다단한 세계가 굴러가는 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탄생한다고 믿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행위자가 혼재하며, 그 행위자 각자의 이해관계는 끝도 없다. 사람은 막중한 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인과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세계를 뒤에서 몰래 조종할 권력을 가정하여서라도 혼란에서 탈출한다. 그것이 세계 정부든, 파충류 외계인이든, 아니면 일루미나티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의 신념을 오염시키지 않는다면야, 세상을 온갖 특수한 설정을 도입해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음모론 모델은 재미있긴 확실히 재미있다. 비밀은 수많은 이야기의 핵심이며, 어떻게 우리가 단순명쾌하게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설명해준다는 데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산화의 소설에서는 그 음모론적 비밀이 아주 능수능란하게 활용된다. 게다가 이산화의 소설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합의된 허구라 잘못된 신념에 빠져들 리도 없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커다란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조금 솔직해지자면, 내가 암약하는 세계 정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어도, 나는 그 스케일이 좀스럽고 지나치게 황당무계한 음모론에서는 가끔 현실성을 느낀다.
단편 '햄스터는 천천히 쳇바퀴를 돌린다'로 예를 들자. 주인공인 'C'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한국의 어떤 정보기관에서 일한다. C는 유수의 엘리트이지만 그가 방첩부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포털 사이트의 가장 말도 안 되는 블로그를 사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 지도를 이리저리 자르고 붙이면 역사의 대예언이 등장한다고 주장하는 곳'과 같은 블로그가 남파 간첩이 남긴 암호라는 것이다. 나는 이 업무에서 천천히 말라 비틀어지고, 그는 딴짓을 하다가 어떤 블로그에 한 햄스터의 기록이 8년째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방첩부에서 시민의 블로그나 파헤치고 있는 C를 생각한다. 그렇게 얼레벌레 진행되는 좀스러운 음모와 비밀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고 있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세상을 조금씩 분명하게 나쁘게 할 것이다. 정확하게 짚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암약하는 세계 정부가 없다는 건 사실 좀 흥미가 떨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세상은 원래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니까.
심너울 소설가
서강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의 2018 '같이, 가치' 프로젝트에서 소설 '정적'으로 데뷔했고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로 2019년 한국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다. 장편 '소멸사회'와 단편집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를 출판했다. 이름은 본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