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까지만 해도 LG전자 TV 사업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허영호 사장은 2000년 갑자기 LG마이크론 대표로 발령난다. 당시 LG마이크론은 대우 회사채를 대규모 매입했다가 IMF 사태로 대우가 무너지자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결국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다. 허 사장은 임직원들과 위기 의식으로 무장해 정면 돌파에 나섰다. 경영난을 우려했던 LG마이크론은 불과 1년 만에 흑자를 냈고 마침내 코스닥 등록까지 성사시켰다.
그런데 그해 말 LG이노텍의 부품 사업을 다시 구원하라는 특명을 받는다. ‘일이 있으면 어디든 간다’는 특유의 소명 의식으로 LG이노텍 부품사업본부장으로 투입됐다. 지난 2002년 허 사장이 정식 취임할 당시만해도 LG이노텍은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중소 부품 회사였다. 연매출도 겨우 3000억원 규모에 그쳤었다. 겉모습만 초라한 게 아니었다. 직원들의 근무 자세나 환경, 투자·교육 등 모든 면에서 LG그룹 계열사로 보기엔 열악한 형편이었다. 당시 허 사장은 본사 격이었던 광주 사업장에 숙소를 마련하고 가장 먼저 출근해 직원들이 ‘할 수 있다’ 자신감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솔선수범했다.
LG이노텍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뒤 지난 2004년부터 허 사장은 본격적인 성장 전략을 추진했다. 지금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카메라 모듈과 파워 모듈 등도 그때 새롭게 태동시킨 사업이었다. 당시 대다수 임원들은 기술력도 전문 인력도 없다는 이유로 신규 사업에 부정적이었다. 허 사장은 한사람씩 설득에 들어갔다. 지금 연매출 1조원대로 성장한 카메라 모듈 사업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난 2006년에는 경기도 안산에 소재부품연구소를 설립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체력인 연구개발(R&D) 역량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상황에서도 LG이노텍을 상장시키고, 이듬해에는 LG마이크론과 합병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지난 10여년간 LG그룹 부품소재 사업의 기반을 다지고 연매출 4조원대, 글로벌 부품소재 9위 기업을 만들어 놓은 주역이 지금 아름다운 모습으로 퇴진한다.
서한기자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