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반도체 회사 프리스케일이 네덜란드 NXP반도체에 인수합병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때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로 최첨단 기술을 선도했던 회사가 사라졌다.
프리스케일은 2004년 모토로라 반도체 부문이 분사해 세워졌다. 90년대 초반 세계 반도체 업계를 호령했던 일본 회사들도 이미 대부분 몰락했다.
반대로 30년전 10위권 안에 겨우 이름을 올렸던 인텔과 아예 순위 안에 없었던 삼성전자가 최대 기업이 됐다. 앞으로 10년 후 이 회사들도 여전히 정상을 차지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30여년 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강자는 몰락하고 후발주자가 부상했을까.
당시는 메인프레임이라 불리는 대형 컴퓨터 시대에서 미니컴퓨터를 거쳐 개인용 컴퓨터(PC)가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다. 개인용 컴퓨터에 쓰이는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는 엄격한 계산에 안 쓰인다. 이 때문에 높은 신뢰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이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싼 가격이 요구됐다.
이런 로엔드 시장 확산과 더불어 인텔과 삼성은 기존 강자를 물리쳤던 것이다. 하버드 경영대학 크리스텐슨 교수가 설파하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의 좋은 예다.
세상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2015년 가트너 자료에 따르면 IoT용 반도체 시장규모도 2013년 77억달러에서 2020년 352억달러로 성장한다. 그 성장률도 전체 반도체 성장률 4.6%의 다섯 배에 이르는 24.2%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IoT 반도체는 고기능을 요구하지 않는다. 센서로부터 신호를 처리해 서버나 게이트웨이로 전달하는 단순작업만 하면 된다.
대신 세상의 모든 것에 장착할 수 있도록 가격이 싸야 한다. PC 시대가 열리던 30여년 전의 데자뷔다. 인텔과 삼성은 부상하는 파괴적 혁신 기업의 도전에서 이제 업계 리더로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하는 숙명을 맞이하고 있다.
IoT 반도체에 요구되는 또 다른 특성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해야 한다. 특정기능이 요구되는 IoT 반도체는 지금 규모의 반도체 라인에서 며칠만 생산하면 세계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도 있다. 다품종 특성을 갖는 IoT 반도체는 적용 제품 다양화와 더불어 전체 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PC와 스마트폰 시장이 저물고 있다. 이와 함께 기존 반도체 시장 주력 품목이었던 CPU, AP, 메모리 시장도 정체되고 있다. 이는 메모리에 편중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에는 치명적 타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IoT 반도체 시장 확산에 대비해 준비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대기업이 뛰어들기엔 시장 규모가 너무 작다. 둘째, 소량 제조하는 IoT 반도체 제조에 첨단 공정기술을 적용하면 단가가 높아진다. 셋째, 메모리처럼 똑같은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반도체 라인에서는 효율 면에서 생산 가능하지 않다.
결국 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대기업이 IoT 반도체를 개발할 수 없다. 정부 역할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30여년 전 세계 1위 반도체 생산국 지위에서 몰락한 일본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인 AIST를 중심으로 IoT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경량팹(Minimal Fab)과 초저가 공정 기술 개발을 진행하며 IoT 시대에 재기를 노리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민간 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으니 더 이상 정부 투자가 필요없다는 근시안적 논리로 반도체를 국가연구개발 우선순위에서 최하위로 선정했다.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2014년 기준 세계 반도체 시장 16.5%를 점유하며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반도체 생산국인 우리나라의 반도체 거인들이 쓰러진다면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세계 반도체 업계 흥망성쇠를 직시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이 필요한 때다.
양지운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반도체 공정·장비 PD(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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