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반기술 경쟁력부터 키우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후 우리 사회는 크고 작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굳이 IMF의 요청이 아니라도 고환율, 고금리, 고물가에 고실업률이 기업과 가계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변하지 않으면 국가도, 기업도, 가계도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우리로 하여금 변화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특히 기업은 안팎으로 변화의 압력을 더욱 강하게 받고 있다. 부채비율이 낮은 견실한 기업은 오히려 유동성이 떨어져 성장성이 낮다는 논리가 한동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었고 은행돈을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 곧 수익을 늘리는 지름길로 통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율상승과 금융마비 현상은 한순간에 기업의 철학을 바꾸도록 요구하고 기업은 생존을 위한 엄청난 몸부림을 시작했다.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조직의 변화는 우선 눈에 띄는 외피일 뿐 기업 내부의 변화는 더욱 근본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는 현상은 제품의 변화다. 고물가, 고실업률이 내수기반의 붕괴를 재촉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내수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IMF형 가전」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환율로 상실된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한 부품의 수입대체 노력, 외산제품 리스에 의존해 온 학교나 의료기관 장비의 국산화 노력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그동안에도 기반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전반적으로 최고, 최대라는 어휘에 지나치게 현혹돼 온 일면이 있다. 기반기술 확보 노력도 최고, 최신을 겨냥하며 외산 부품의 조립일 망정 대형 완제품만을 지향해 왔다.

진실로 기반기술을 확보하려면 소소한 부품 하나라도 똑부러지게 내놓을 실력을 길러야 했음을 늦기는 했으나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국내 부품산업이 이처럼 허약한 상황에서는 환율급등만으로도 경제 전반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번 IMF사태 속에서 확실하게 경험하고 있다. 이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이번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수확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바로 이같은 기술의 틈새를 메우는 일이 될 것이다. 정부도, 기업도 저마다 나서서 수출만이 살 길이다, 기술개발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외양이 큰 기술만 생각하지 소소하되 부가가치가 높은 것으로 눈을 돌리지는 못하고 있다. 이같은 사고가 우리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는 거품을 양산해 왔다. 거품을 줄여야 할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요구되는 세밀한 틈새 메우기에 기술개발의 1차 수혜자인 기업이 나서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염두에 둘 일은 장사가 되는 한 제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단순한 전략이 위기상황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D램 반도체가 호황일 때 우리 사회는 곧 선진국이 된 듯한 착각 속에 그 이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D램을 버리고 제품의 다양화에 나서며 국내 반도체시장의 틈새를 파고들 때도 우리는 D램이 벌어들이는 달러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기초가 되는 기술을 확고히 하기보다 저마다 첨단이라는 단어에 취해 국내시장을 방기하고 있는 사이에 국내 부품산업은 성장지체 현상을 보였다. 저가 외산 부품이 국내의 바닥시장을 훑고 고가의 첨단 부품이 산업체시장을 장악해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그만 국내 시장보다는 넓은 세계 시장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서.

그러나 내수기반을 잃은 세계화 전략은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무인도의 다리없는 노인처럼 누군가를 인질로 잡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망한 꿈일 뿐이다. 우리가 IMF의 여러 요구를 긍정하면서도 불안해 하는 점 또한 국내 내수기반을 붕괴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 속에서 기업들은 이제 잠시 눈을 내부로 돌려 국내에서 요구되는 크고 작은 기술들을 키워내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 기술을 대기업이 혼자 다 맡으라는 주문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말만 나오고 실천되지 못한 부품조달 기업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공생할 수 있는 길은 마련해 놓으라는 것이다. 영세한 하청기업이 덤핑수주에 매달리지 않고 착실히 기술을 연마해 나갈 길을 열어주라는 것이고 고급한 기술을 가르치며 이끌어가라는 것이다. 그같은 외양이 갖춰질 때 대기업의 손발이 돼 대기업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이 국내 산업의 맏형 노릇을 제대로 하면 국가 경제도 든든해지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기업의 영향력도 커진다는 점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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