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배터리 패권전쟁이 시작됐다. 선전포고는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 연이어 나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반도체, 배터리 등 4개 품목에 대한 공급망 조사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 행정부는 100일 동안 이들 4개 품목의 제조 역량과 공급망의 잠재적인 위협, 연구개발(R&D) 필요성과 함께 기후변화 및 지정학적 위협까지 면밀히 분석한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의 손에는 반도체 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미국이 반도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전 세계에 던지는 명확한 메시지다.

그리고 정확히 1개월 뒤, 잠자고 있던 미국의 '반도체 거인' 인텔이 새로운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도약하겠다는 'IDM 2.0' 전략을 발표했다. 인텔은 그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 중앙처리장치(CPU) 미세공정 혁신과 함께 세계적 수준의 파운드리 서비스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의 거점이 될 신규 팹 2기 건설에 올해에만 200억달러를 투자한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이미 아마존, 시스코, 구글, IBM 등 자국 기업과 유럽 팹리스 업체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자신했다.

최근의 움직임이 워낙 두드러지지만, 첨단 기술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 회복 의지는 10년 전부터 예견된 것이다. 지난 2011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의 첨단 제조업 위기 인식과 함께 중국을 사실상의 '주적(主敵)'으로 상정했다. 이후 미국은 주도면밀한 전략 하에 무역전쟁과 기술규제로 중국을 옥죄고 있다.

EU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태세다. EU 집행위원회는 오는 2030년까지 유럽 내 반도체 생산을 전 세계 생산의 20%까지 높이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동안 중국과 미국 등에 의존해 온 반도체 수급 불균형을 바로잡지 않으면 유럽의 생산 기반이 위태롭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급기야 세계 1위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은 전기차에 탑재될 배터리 내재화를 선언하며 기존 공급망을 송두리째 바꾸겠다고 나섰다. 특히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주도하는 파우치형 배터리가 아닌 각형 배터리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미국과 EU의 움직임은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동아시아가 주도하는 첨단 기술 공급망의 위험성을 목격한 전통 기술 강국들의 반격 선언이다.

이제 우리 산업계의 냉철한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반도체는 공고한 메모리 시장주도권 강화를 위한 기술 초격차 확보와 함께 해외 생산까지 포함한 공급망 재편을 주도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파운드리는 기존 고객사를 유지하는 동시에 국내 팹리스와 협업을 통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혁신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무작정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계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배터리 업계는 향후 몇 년 안에 생사의 기로에 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지녀야 한다. 완성차가 주도하는 배터리 내재화는 이미 대세가 됐다. 완성차 업체들은 이제 배터리를 '직접 만들어야 할' 핵심 부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기술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오픈 이노베이션 시대에 그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것이다. 결국 완성차를 압도할 고성능 및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해 활로를 찾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패권전쟁 와중에 K-배터리 산업계는 내분으로 전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전열을 정비할 골든타임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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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석 산업에너지부 데스크 jsy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