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 소재 수출 규제 강화 외 내달부터 '화이트 국가'서 배제
일본발 경제 보복 파장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넘어 국내 산업계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주요 그룹과 산업계가 일제히 일본의 경제 보복 확대와 장기화 대비책 마련에 착수했다. 수출 규제가 강화된 3개 품목(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외에도 다음 달 1일부터 전략물자를 포함한 다른 일본산 소재부품이 대 한국 수출 규제 대상에 오를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전반적 반한-반일 감정 여파로 상품 판매와 기업 브랜드 이미지에도 적잖은 변화가 불가피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8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협력사에 공문을 보내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재부품에 대한 구체적 확인 작업을 진행했다. 입고되는 제품 가운데 일본산 소재부품이 얼마나 되는지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확인 항목이 수백가지에 이를 정도로 가장 밑단에 있는 소재부터 어떤 부품에 어느 소재를 얼마나 사용하는 지 정밀하게 조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태 장기화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관측이다.
업계에 따르면 이번 조사는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발표가 나온 후 시작됐다. 현재는 결과가 다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쪽에 전달됐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모든 요청 사항들을 확인해 전달했다”고 말했다.
양사는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통계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수입 대체처 찾기나 소재부품 국산화 추진에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외에도 스마트폰 등 세트 제품에도 일본산 소재와 부품을 사용하는 만큼 전사적으로 대책을 수립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지난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3개 소재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의 한국 수출을 '포괄수출허가'에서 '개별수출허가'로 변경했다. 수출 절차가 복잡해져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은 소재 수입 지연 등 수급에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특히 이번 규제 강화 조치는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 성격이 강해 향후 수출 중단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은 추가로 전략물자 등으로 수출 규제 품목을 확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안보 우호국을 뜻하는 '화이트 국가'에서 오는 8월 1일부터 한국을 배제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화이트 국가에서 빠지면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도 까다로워진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수입 규제 품목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 경우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은 물론 자동차, 정밀화학 등 산업으로 파장이 확대될 수 있다. NHK는 일본 정부가 규제강화 대상을 일부 공작기계와 탄소섬유 등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직접 피해 대상이 아닌 기업군도 사태 장기화에 대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10년 만에 일본 자동차 시장 재진출을 추진해 온 현대자동차에도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구체적인 시장 진출 전략과 시기 등을 최종 조율하는 단계여서 내부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다만 오는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2019 도쿄모터쇼'에는 단독 부스 계약을 한 상태다.
현대차는 일본 시장 재진출을 위해 2017년부터 일본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시장 전략을 짜 왔다. 이번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와 반한 감정 등을 고려, 재진출 시기가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롯데그룹도 비상등이 켜졌다. 일본과 합작사가 즐비한 데다 지분 구조도 직간접 얽혀 있어 경영상 불확실성이 커졌다. 특히 지주사 체제 마침표인 호텔롯데의 상장을 위해선 일본 롯데홀딩스 경영진 동의가 필수지만 양국 갈등이 장기화되면 차질이 예상된다. 지난 5일 일본으로 출국한 신 회장은 일본 주주들을 만나 국내 분위기를 전하는 한편 현지 금융기관 등 주요 거래처 상대로 양국 관계 경색으로 인한 리스크 최소화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아직은 사태 추이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면서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사장단 회의에 계열사 대표들이 모이는 만큼 한·일 관계 리스크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류 콘텐츠 업체 등 다른 분야 기업도 사태 확산에 대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우리 기업들은 온라인게임과 메신저, 한류스타를 통한 콘텐츠 등에서 일본 사업을 활발히 해 왔다. 양국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경우 비즈니스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불가피하다.
온라인업계 관계자는 “소재와 관련된 이슈여서 당장 큰 리스크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일본은 해외 사업의 큰 축인 만큼 조심스럽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재계는 이번 사태가 외교 문제로 촉발된 만큼 정부가 좀 더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30대 그룹 총수들과 만날 예정으로 있다. 일본과 장기전을 대비해 일본 조치에 대한 기업 측의 어려움을 듣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 대통령은 8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전례 없는 비상 상황을 맞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경제계가 긴밀하게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이라면서 “한편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위해서도 차분하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정부가 생색내기 회의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때”라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정부와 업계가 함께 나서서 핵심 소재에 대한 일본 의존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른 관계자는 “정부와 산업계가 함께 대응법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우군 기업과 연계 등 다각도로 해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권건호 전자산업 전문기자 wingh1@etnews.com, 박준호기자 junho@etnews.com, 박태준 자동차 전문기자 gaius@etnews.com,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