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의 세이프가드를 WTO에 제소했지만 가전업계는 꿀 먹은 벙어리 처지에 놓였다. 미국 세이프가드 발동으로 월풀 등 현지기업이 실리를 취한 반면, 국내 가전기업은 실질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판결까지 수년이 걸리는 점도 업계로서는 답답함을 더한다.
15일 국내 가전업계는 정부 조치에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복수 가전업계 관계자는 “세이프가드 발동이 부당한 조치인 만큼 세이프가드를 조속히 해소하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세이프가드 제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미국 가전업체는 이미 실질적 이득을 취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압박에 LG전자와 삼성전자는 각각 테네시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현지 생산공장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1월부터 현지 생산라인 본격 가동에 들어갔고, LG전자도 공장 가동 일정을 앞당기고 있다.
세탁기 세이프가드를 청원한 월풀도 원하는 바를 얻었다는 분석이다. 50% 고율 관세 폭탄으로 미국에 수출되는 한국 세탁기 가격도 평균 8% 상승했다. 업계가 현지 유통 체인과의 프로모션을 활용해 가격 상승폭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가격 인상효과는 피할 수 없다. 미국 안방시장에서 한국 세탁기와 경쟁에서 고전하던 월풀도 가격 경쟁에서 이득을 봤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에 따르면 미국 세탁기 시장에서 월풀 점유율은 15.8%로 3위를 기록했다. 삼성전자(20.5%), LG전자(16.0%)에 밀려났다. 2015년까지만 해도 월풀 점유율은 19.7%로 1위였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밀려 매년 점유율이 하락했다.
판결을 이끌어내는 것도 문제다. 세이프가드 판결은 통상 1~2년이 걸린다. 그러나 1심을 통과한다고 해도 2심 상소 역시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 판단이다. 2심 상소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만큼 또 하나의 장애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세이프가드 판결이 나기까지는 수년 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WTO 결정이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사실도 부정 전망을 낳는다. 결국 미국 가전기업은 상당기간 세이프가드 혜택을 고스란히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 통상 전문가는 “세이프가드 판결을 위한 2심 위원단 정족수가 장기간 채워지지 않고 있는 실정으로 2심 상소도 쉽지 않다”며 “승소하더라도 국내 기업이 받는 보상은 미미한 반면, 미국은 세이프가드 발동으로 실리를 모두 챙겼다”고 평가했다.
세이프가드는 특정 품목 수입량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꼽힌다. 미국이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것은 16년 만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4일 대형 가정용 세탁기와 태양광 전지·모듈에 미국 세이프가드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고 보고 WTO 분쟁해결절차에 회부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영호기자 youngtig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