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 <24>아버지 전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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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할 줄 알았다. 아니 담담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전립샘암 말기 상태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의사는 약물 치료로 잘하면 5년, 1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했다. 희망을 가지고 약을 복용했다. 3개월 만에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는 이미 골수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아버지는 엄하고 권위 강한 존재였다. 따스한 말 한마디나 사랑의 제스처 따윈 모르는 양반이었다. 여고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나는 놀라운 장면을 마주했다. 친구가 자기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저럴 수 있다니.

내 아버지는 늘 야단쳤다. 옷매무새를 반드시 하라,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마라, 다리는 오므리고 앉아라, 일찍 들어와라, 짧은 치마 입지 마라, 화장하지 마라…. 문장 첫마디는 '어디 여자가'로 시작했다. 언행은 물론 자녀의 욕망까지 관리하셨다.

맏언니가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밤 10시를 넘겨 12시가 다될 때 들어왔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니의 긴 머리채를 한 무더기 움켜잡고서 가위로 싹둑 잘랐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여자의 자존심이란 걸 아셨다. 언니는 한나절을 통곡했다. 그러곤 뭉개진 자존심을 이튿날 민머리로 저항했다.

언니보다 먼저 아버지께 저항한 사람은 나였다. 고등학생 때 제사상에 잘못 놓인 제사 음식으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야단쳤다.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말 한마디 못하고 주눅 든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왜 그러세요? 어머니가 뭘 잘못했다고 큰소리치세요?”

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분에 떨었다. 당신께 대든 나를 '패륜아'라 했다.

부모님의 불화는 늘 아버지 동생들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보다 당신의 동생을 더 아꼈다. 제사상에 제사 음식이 잘못 올라간 것을 지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누이동생, 내 고모였다. 아버지는 증조모 손에 컸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 고문 후유증으로, 조모는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세상에 오롯이 남은 동생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알 나이가 아니었다.

모정(母情)만 기억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헌신한 것도 희생한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권위로 무장하고 질타에 익숙한 아버지에게 부정(父情)이 있을까 의심한 날이 더 많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아버지는 해 준 게 많았다. 대학까지 가르쳤고, 결혼도 시켰다. 아버지는 따스하게 타이르거나 좋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어허, 어디 여자가' 하며 단속하신 덕분에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않고, 단정한 옷매무새로, '여자답게' 자랐다. 불편한 절제가 인생의 안전장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늦은 나이에 알았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시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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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병실에서 우리 남매를 마주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암세포가 아니라 이제 세상과 이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내가 사는 동안 가장 긴 인연이 되어 준 존재와 헤어짐을 준비한다. 그도 나도 이별이 두렵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어색해서, 민망해서 못하셨다. 나도 그에게 고백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버지, 사랑해요.”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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