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말기. 옛 초나라 대장군 항연의 아들 항량은 조카 항우와 함께 회계에서 거병했다. 그는 군사 범증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 회왕 후손인 미심을 찾아 왕으로 옹립했다. 명분(名分)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군대는 의병에서 왕군으로 격상됐고, 유방을 비롯한 영웅들이 초나라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하지만 진나라가 멸망한 후 권력을 장악한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올랐다. 그리고는 자신이 왕으로 내세웠던 회왕을 살해해 버렸다. 이는 초한전쟁 빌미가 됐다. 회왕은 비록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으나 그를 살해한 사건은 유방이 항우를 공격하는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결국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려 유방에게 패한 항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8년 3월 경기도는 서울대와 공동으로 수원 광교테크노밸리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이하 융기원)을 설립했다. 경기도는 1425억원에 이르는 건축비와 연간 35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유치한 융기원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와 도의회가 큰 성과로 여긴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지난 10월 이후 융기원은 원장이 정치적인 의사를 표출했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일부 의원들은 “예산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전임 원장은 물러났다. 그럼에도 도의회는 서울대의 협약 불이행을 내세워 예산을 35억원에서 5억원으로 대폭 삭감해 버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가 내년도 예산을 너무 적게 책정했다며 예산 심의를 보이코트했던 경투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부 의원은 아직도 ‘전액 삭감’을 주장하고 있다.
예산을 끊는다는 것은 곧 ‘퇴출’을 의미한다. 경기도에서 융기원을 몰아내겠다는 얘기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할 도의원들이 표면적으로는 ‘기여도를 높이라’고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나가라’며 등을 떠미는 모양이다. 명분이 약할 뿐만 아니라 이율배반적인다. 정치보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명분 없는 행동은 생떼에 불과하다. 결코 지지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역공의 명분만 쌓아줄 공산이 크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