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용 전기계량기를 전력회사에 납품하는 중소전기업체 A상무는 한국전력 자회사 입찰에서 공사를 수주한 이후 한숨이 늘었다. 최저입찰로 공사를 낙찰 받은 기쁨도 잠시, ‘제품 가격 외 설치비용을 낙찰자가 부담하라’는 한전 자회사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떠안지 않으면 계약을 못할 분위기다. A상무는 생산라인과 가용 인력을 놀릴 수 없어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사를 진행했다.
전력사들이 내핍경영에 나서면서 협력사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원자재가 상승으로 원가부담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비용부담을 중소기업에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현장에서는 설비 신규교체 이외에 추가공사를 요구하는 이른바 ‘하청업체 쥐어짜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11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하청업체에 대해 발주처의 별도 공사요구와 잦은 설계변경으로 인한 추가 비용은 물론이고 인건비도 제대로 산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 전기업계는 한전의 유지보수 공사 대부분이 한전KDN을 통해 사실상 독점 발주되고 있어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본 계약과 별도로 요구하는 추가공사다. 현장 사무소 보수 및 전기공사에서부터 다른 업체가 작업한 설비와 시스템 교체 및 유지보수까지 다양하다. 업계에선 이를 발주사에 공사를 무상으로 기부한다는 의미로 ‘기부채납 공사’라고 일컫는다.
한 발전설비 중소업체는 발전소 관제시스템 성능개선 작업에 참여하던 중 보호계전기 교체공사를 요청받아 수행했지만 장비 값만 받고 인건비를 비롯한 별도 부대비용은 받지 못했다.
이 업체 임원은 “전력 업계에서는 발주처의 공사기부 요구는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졌다”며 “전자제품 AS기사가 냉장고를 수리하러 왔을 때 타사 TV·세탁기 수리도 요구하듯이 이를 너무 쉽게 여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잦은 설계변경으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설계변경으로 전체 공사기간이 지연되면서 공사비가 늘었지만 이에 대한 비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전기설비 중소업체들은 계약금액의 20% 수준인 유지보수율은 꿈도 못 꾼다. 스마트미터 업계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전력회사들은 20%의 유지보수율을 적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 이를 지키는 기업은 거의 없다”며 “낙찰 후 구두로 13~15%를 요구하면 이를 거절할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 한전KDN 협력사로 업무를 진행한 전기설비 업체는 이러한 악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업종까지 변경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회사 관계자는 “한전KDN에서는 추가 작업에 대한 인건비가 나왔지만 현장 작업반장이 이를 은닉해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사례도 있다”며 “지금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이를 적발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추가공사 요청과 유지보수율이 구두 지시되는 경우가 많아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종류의 악습은 제보가 가장 큰 역할을 하지만 한전KDN이 사실상 유지보수를 독점하는 상황에서 관계유지를 위한 뇌물성 ‘기부채납 공사’를 하는 경우도 있어 문제해결의 가닥을 잡기가 힘들다.
이에 대해 한전KDN 조용래 기업홍보팀장은 “현장의 간단한 작업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입장이 있을 수 있고 ‘협력사는 비용을 받아야 하는 작업’이라는 모호한 경계선인 있다”며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갑을의 일방적인 관계가 많이 없어졌으며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회사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분명히 불공정한 거래지만 이를 제보하면 발주처는 물론이고 하청업체도 감사 및 수사대상이 되는 만큼 이를 감수하고 제보에 나설 업체는 아마 없을 것”이라며 “한전 및 한전KDN 등 발주사들이 스스로 발주공사와 공사비 지출관계, 공사 하청업체 비용 지불 관계 등을 꼼꼼히 따져 악습을 없애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김동석·조정형기자 d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