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선산업이 중국을 제치고 상반기 수주량과 금액 모두 세계 1위를 탈환했다. 중국에 1위 자리를 뺏긴지 2년 만의 쾌거다. 선박신조시장의 10.2% 하락에도 불구하고 고부가가치선에 집중한 결과다.
몇 년 전 IT전문가들이 조선업계의 경쟁력 비결을 알아보려고 현대중공업을 방문했다. 벽에 붙은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다. ‘글을 적는 자 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를 알고 탄복했다. 수십 년 전부터 모든 작업 공정을 꼼꼼하고 철저하게 기록하고 문서화해 오늘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기술 공유, 품질·프로젝트 관리, 꾸준한 업무 프로세스 개선이 가능했다. 대형 선박 제안에 필요한 2~3층 높이 제안서도 거뜬히 작성했다.
가장 뛰어난 초고속 인프라 망을 구축한 IT강국이라고 자부하지만 소프트웨어(SW) 분야만큼은 아직 부족한 게 우리 현실이다. SW의 중요성을 잘 알고, 뛰어난 인적 자원을 가졌음에도 왜 그럴까. 그 답을 조선산업의 ‘적자생존’에서 찾을 수 있다.
“SW 개발에 요구분석, 설계 단계가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이들은 SW 개발이 마치 문학이나 예술 작품처럼 머릿속 아이디어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구현하는 일종의 창작활동으로 생각한다. 복잡·대형화하는 시스템 개발 환경에서 체계적인 접근 방법 없이 프로젝트에 성공하기 어렵다. 지속적인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경쟁력 있는 SW 개발 프로세스는 무엇인가. 발전 과정을 4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요구 기능을 익숙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머릿속 논리에 따라 개발한다. 모든 개발 활동을 개발자의 지적 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일종의 창작(Art) 활동 단계다. 개발자들 사이에 프로세스가 공유될 수 없으며, 각자의 방법대로 개발이 이뤄진다.
이 단계를 지나면 모두 나름대로 논리에 따라 개발하는 가운데 뛰어난 개발자가 SW 개발을 주도한다. 마치 중세 장인 중심의 도제로 작업이 이루어지듯 뛰어난 개발자 경험과 지식이 모든 개발자가 따라야 할 방법론이다. 이 사람의 능력과 역할에 의해 프로젝트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우리 현실은 대부분 이 단계가 아닌가 싶다.
세 번째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체계적인 접근 과정과 일관된 방법이 만들어지고 조직의 표준으로 정착되는 단계다. 참여자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프로젝트 관리가 가능한 공학의 단계다. 이 단계가 돼야 비로소 많은 개발자들이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성공적 추진이 가능하다. 프로세스 개선을 통해 SW 개발과정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창작 활동으로 여긴 SW 개발도 부품을 조립해 완제품을 만드는 제조 공정과 같은 단계로 발전한다. 기존 프로그램들은 다시 쓸 수 있도록 콤포넌트화하고 정보저장소에 보관한다. 요구 기능을 처음부터 만드는 대신 이를 찾아 부품 조립 형태로 개발해 품질과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게 ‘적자생존’이다. 개발 과정 프로세스, 표현 방법의 정립과 함께 이러한 방법론에 따라 자기가 하는 일의 모든 과정을 꼼꼼하고 철저하게 기록해 문서화해야 한다. 해외 프로젝트를 수주하거나 해외에 외주를 줄 때 우리 SW 업체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또 잘 안 돼 결국 실패하는 원인은 개발방법론과 기록, 문서화의 부족이다. 머릿속 경험과 지식을 정형화하고 문서화하지 않으면 기술 공유, 품질·프로젝트 관리, 꾸준한 업무 프로세스 개선이 불가능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진옥 비트컴퓨터 대표 jojeon@b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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