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20세기의 자유와 정의를 대표하는 책이다. 나치에 저항한 독일 지하조직 ‘백장미단’의 비참한 최후를 서술한 내용이다. 자유와 정의를 목숨과 맞바꾸면서 활약했던 ‘살아 있는 양심’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 숨져간 독일인 대학생 한스의 누나가 후일담을 통해 적어 낸 실화다. 책의 주인공은 인류 최악의 폭력에 저항한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남아 죽은 자의 얘기를 풀어낸 주인공 한스의 누나 잉에의 고통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참사, 민항기 추락 등 생각하고 싶지 않은 참사는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럴 때마다 국민은 억울하게 죽어간 고인들을 애도한다. 반면 그 참사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에는 크게 귀기울이지 않는다. 살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뜻일 게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옛말 때문인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산 자의 고통에는 오히려 ‘행운’이라는 정반대의 의미가 붙어 있다.
한국의 벤처 역시 그렇다. 지난 2000년 이후 수많은 벤처기업이 사멸했다. 벤처의 성공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은 누누이 되풀이돼 온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벤처 붐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엄청난 금액의 프라이머리 CBO를 벤처에 지원했다. 뒤늦게 기술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프라이머리 CBO의 수혜업체 상당수가 이미 호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정부의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손실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다 보니 살아 있는 기업에 대한 회수 압력이 더욱 거세다.
죽은 기업이 평안할 리 없다. 영면한 기업의 CEO 또한 편할 리 없다. 하지만 죽은 기업에 대한 요구는 더는 없다. 답답한 상황이 왜곡돼 살아 남은 기업의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 프라이머리 CBO가 ‘보이지 않는 연좌(?)’로 작용하는 한 살아남은 벤처들의 어깨는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잘못된 벤처지원 정책의 결과를 산 자의 몫으로 남긴다면 산 자마저 죽은 자로 만드는 꼴이다. 한국 벤처경제의 모습이다.
디지털산업부·이경우차장@전자신문, k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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