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장인순 한국원자력연구소 고문(5)

(5) 어머니와 태극기 

한국원자력연구소 입구 언덕위에 한강이남에서 가장 큰 태극기가 24시간, 일 년 내내 휘날리고 있으며 그 옆에 ‘원자력기술자립은 후손을 위함입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99년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맨 먼저 언덕 위에 태극기와 함께 이 문구를 내세운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지금은 우리 원자력을 하는 사람들이 환경 단체로부터 많은 핍박과 도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니 아주 가까운 장래에 원자력이 바로 국가안보와 같이 중요한 에너지안보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원자력인들은 지금이 아닌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서 원자력 기술자립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긍지와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60년대에 1∼2달러 하던 유가가 요즈음에는 50달러를 넘어섰으며, 브릭스(BRICs)같은 인구 대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수요가 공급을 앞서는 상황에서 100달러를 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거기다 또 도쿄 의정서가 발효되면서 우리경제에의 압박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자원빈국인 이 땅의 후손을 위해서 원자력 기술을 자립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나라사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들의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대형 태극기를 걸 수 있는 국기게양대를 만들었고 나란히 원자력을 해야 하는 이유를 내걸었다.

국기게양대 설치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지난해에 연구소의 우라늄 농축 실험으로 국내외가 시끄러웠을 때 처음으로 나만의 태극기 비밀을 이야기했다. 특히 연구소 홈페이지에 수없이 많은 국민의 격려의 글을 읽고 목이 메었으며, 우리에게 보내주신 뜨거운 격려에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보릿고개와 가난이 상식으로 통했던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에 7남매를 기르신 어머님의 희망은 자식이 당시 상황과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한 성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들의 유학이 유일한 희망이고 삶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69년 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밤 어머니께서 내 방에 들어오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께서는 내게 눈물로 정담의 당부 말씀을 하시는 대신 하얀 종이에 곱게 싼 것을 건네주시고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순간 내 손안에 들려진 것은 무게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지만 그보다 수천 배의 무게가 나의 가슴속에 얹어지는 것 무엇일까? 하얀 종이를 풀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깨끗한 ‘태극기’ 한 장이 얌전히 접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극기를 펼쳐 들고는 오랫동안 어머니 마음 앞에서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나라 사랑해라,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 한마디 없으셨고, 교육도 받지 못한 어머니가 100 달러를 가지고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건네주신 태극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결국 연구소 언덕에 맨 먼저 대형 태극기를 건 이유였다.

또한 환경단체나 일부 시민들로부터 원자력을 한다는 이유로 많은 냉대와 야유를 받고도, 원자력과학자로서의 우리들의 삶이 결국은 나라를 사랑하고 후손을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이 후에 유학을 갈 때 아이들의 가방 속에 몰래 태극기를 하나씩 넣어 보냈다. 그 후 딸아이들이 공부하면서 지내는 방에 가보니 놀랍게도 벽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유학을 가는 아이들 가방에 태극기 한 장씩 넣어서 보내는 것이 수백 번 나라를 사랑하라는 말보다 더 낫지 않을까?

머리가 하얗게 백발이 된 지금도 태극기를 볼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는 영원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허리가 잘린 이 작은 한반도도 영원히 우리 후손이 지키고 살아가야할 조국이 아니겠는가?

ischang@kae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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