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시아이(愛書是我利).’
작년 연초에 필자가 봉직하고 있는 학과의 과훈으로 만든 문구다. ‘책(학문)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꽤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은 요즈음 국내 대학 교수와 모든 이공계 연구자의 초미의 관심사인 ‘SCI(Science Citation Index)’를 한자 발음대로 쓴 것이다.
SCI란 원래 미국의 민간기관인 과학정보연구원(ISI:Institute of Science Information)이 매년 전세계에서 발간되는 자연과학분야 학술지중에서 인용도와 영향력이 상위 15%에 드는 3900종의 우수 학술지에 등재된 논문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자료를 말한다. 이 SCI는 현재 국내의 대학평가, 교수 임용 및 교수들의 연구업적 평가와 정부 연구비 지원 등에서 매우 중요한 평가도구로 사용된다.
이렇듯 SCI는 국내 대학 사회의 모든 평가에서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수 및 연구자들은 SCI 학술지에 논문이 등재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여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서시아이’란 과훈의 존재는 현재 대학사회에서 SCI라는 평가도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다.
SCI 학술지의 선정기준이 엄격하고 질적으로 우수한 논문이 수록된다는 점에서 SCI는 객관적인 평가도구라 할 수 있다. 특히 교수임용 및 정부 연구과제 선정과정 등에서 평가의 객관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SCI 학술지 등재 논문을 통한 객관적인 평가는 우수 연구자를 선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ISI에서도 언급하듯이 인용지수는 학술지의 객관적인 인용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개의 논문의 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도서관이나 학술지 광고주에게 미치는 경제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SCI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서 국내에서는 그 용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대학에서 교수의 업적평가 시에 SCI 등재 논문 수가 다른 어떤 평가 항목보다 큰 부분을 차지, 많은 교수들이 학생 교육에는 소홀한 채 오직 SCI 등재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에만 집착하고 있다.
일례로 명강의로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교수가 SCI 등재 연구논문 평가점수 부족으로 재임용에 탈락됐던 일도 있다. 또한 모든 학문분야에 획일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연구방법이나 연구결과 발표방식에 큰 차이가 있는 다른 학문분야에서는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국내 학술지를 통해 발표하는 논문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데 있다. SCI라는 평가도구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국내 학술지는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국내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출간하면 국내용 연구자라는 낙인을 받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국제화시대에 국제적인 논문을 외국 학술지에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해 표현하면 국제화시대이기 때문에 한글이 아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대로 가다간 국내 풀뿌리 학회활동과 학술지가 고사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국내 연구의 토양이 될 국내 학술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어느 누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평가방법을 싫어하겠는가. SCI라는 평가도구가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준 긍정적인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이를 포함한 다양한 연구 평가 도구의 개발 및 합리적인 제도 개선 그리고 국내학술지의 발전을 위한 방안들을 통해 보다 합리적인 국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구자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정부연구지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과학재단, 학술진흥재단과 또한 국내 기초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각 대학에서 좋은 국내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도 연구자에 대한 평가시 비중을 둬 국내 학술지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김선일 한국과학재단 기초연구단장·한양대 의용생체공학과 교수 sunkim@kosef.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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