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451)

얼마 동안 포장도로를 지나치자 다시 비포장 도로가 나타났다. 저녁 노을이 구름을 불태우듯 온 하늘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운양호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의 일들을 떠올리며 앞쪽에서 다가들고 있는 밭곡식 가득 실은 경운기가 지나칠 수 있도록 차를 도로 옆으로 정지시켰다. 몸체보다도 몇 배나 많은 곡식을 실은 경운기였다.

운양호의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본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의 이러한 불법침공을 당하고도 사건을 알게 모르게 호도하고 음폐하려고 애썼다. 사건이 발생한 지 3일이 지난 후 비로소 의정부가 국왕에게 제언하는데, 단지 정체불명의 외국배가 강화도 부근으로 들어와 불을 지르고 발포했지만 아직도 어떤 나라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그러한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정도였다.

운양호에는 분명 일본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일본한테 당했다는 것을 억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이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한 배와 한가지라 하여 프랑스나 미국 군함인 것처럼 보고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 정부는 뒷날 청나라로 보내는 문건에서까지도 『갑자기 외국배가 침입하자 수비병이 발포하여 경고하고 수비하였는데, 그 쪽에서 거포로 영종진성을 쳐부수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 배가 어느 나라 배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비굴하고도 허위와 기만에 찬 미봉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예측한 일본은 적반하장격의 제2단계 방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좀더 큰 군함과 대포를 이끌고 조선의 쇄국주의 장벽을 향해 프랑스, 미국의 서양인들보다 더 용의주도하게 접근했다.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세계에 있어 언제나 우리에게 배우며 수세기씩 뒤쳐져 평행선으로 추종해 오기에도 바빴던 일본.

그러나 일본은 이제 구미식 근대자본주의 문명을 수입하고 소화하여 새로운 힘을 갖추게 된 것이고, 그동안 우월감에 젖어 있던 조선은 일본의 그 힘에 오로지 전율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 실장, 일본의 NTC 고객통합시스템의 프로그램 작업을 했다는 그 친구, 은행에서 현금이 인출된 시간에는 어디 있었다고 하던가요?』

『인천에 있는 연구실에 계속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했지요?』

『그와 통화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연구실에서 전화통화를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 곳에서 연구실로 전화를 해서 그 친구와 통화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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