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11)

제3부 케임브리지의 동양인-귀국 명령 (2)

61년 봄 성기수가 하버드대학원 첫 학기 때 수강했던 응용수학(應用數學), 유체역학(流體力學), 열역학(熱力學), 전자기학(電磁氣學) 등 4과목의 성적은 A, B, B, B가 나왔다, 전과목 A를 노렸던 당초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장학금 지급이 중단되는 C가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응용수학, 전자기학, 양자역학(量子力學), 통계역학(統計力學)을 신청했던 가을학기 역시 전과목 A를 목표로 했으나 결과는 A, A, B, B로 반타작이었다. 그래도 봄 학기보다 성적이 나아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자동으로 이학석사(科學碩士)학위를 취득하게 되는 기쁨도 함께 누리게 됐다. 하버드대학원의 학칙은 1년간 8과목에서 B학점 이상을 얻으면 논문을 제출하지 않고도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직후, 그러니까 해가 바뀐 62년 1월 어느 날 성기수는 서울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해외에 나가 있는 현역 군인들은 체류기간 2년을 넘기지 말고 모두 귀국하라는 내용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회가 「대한민국 공군 중위 성기수」에게 직접 보낸 것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위원회가 당시 민주당의 장면(張勉)정권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이양받아 설치하였던 국가 최고통치기관이었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서울의 국방당국과 공군사관학교 등에 편지를 보내 국비 유학도 아니니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귀국을 연기해 해달라고 탄원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양자역학을 강의했던 퍼셀(Purcell, Edward Mills) 교수가 수강학생 100여명 가운데서 A학점을 받은 5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별연구반을 구성해서 개인지도를 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퍼셀 교수는 액체 또는 고체 시료(試料)를 이용하여 원자핵의 자기(磁氣) 모멘트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이른바 핵자기공명흡수법(核磁氣共鳴吸收法)을 고안한 공로로 52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세계적 석학이었다. 퍼셀 교수의 제의를 받아 들이냐 마느냐의 여부는 이를테면 순수학문의 길을 택하겠느냐 마느냐 여부를 스스로 묻는 셈이었다. 순수학문을 택할 경우 당시 한국의 연구환경을 감안할 때 미국 영주(永住)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였다.

「순수학문+졸업 후 미국영주」와 「응용기술+졸업 즉시 귀국」를 놓고 며칠을 고민했다. 자신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사정권을 비난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다음 퍼셀 교수팀에 합류해서 한 10년간 마음 놓고 연구에 몰두해 볼까 하는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조국은 역시 조국이었다. 군사정부의 명령을 존중하고 귀국해서 형제자매와 후배 학도들을 도우며 고향의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받드는 것이 도리라는 결론이 섰다. 더욱이 조국은 지금 핵 분야보다는 기계공학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더 절실하게 필요할 때였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체류기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석사과정처럼 또 다시 1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학 초기 세웠던 학업계획을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1년 동안에 기계공학 박사가 되겠다는 초비상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필수 과정인 8개의 박사과정 이수 과목에서 평균 A학점을 따고 동시에 논문연구허가 전에 학위논문을 완성해 놓아야만 했다. 또 영어를 제외한 두 개의 외국어시험과 학위예비시험에 합격해야 하며 때에 맞춰 논문 심사에 대한 최종방어(最終防禦)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런 비상계획을 세우고 난 다음 성기수는 같은 연구실을 사용하고 있는 미국인 동료학생에게 그 성사 가능성을 진지하게 물었다. 동료 학생은 한참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학칙 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윽고 『하지만 하버드대학교 3백년 역사에 그런 전례가 없으니 1년 이내에 모든 일이 실현된다면 또다른 신화가 탄생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격려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동료의 반응에 더욱 전의를 가다듬은 성기수는 그날로 러시아어와 독일어 책을 구입해서 외국어 독학에 나섰다. 논문 주제 역시 당초 예상했던 연구목표를 대폭 수정해서 지도교수와 상의하지도 않고 혼자서 자기유체역학(磁氣流體力學, MHD; Magnetohydrodynamics)으로 정해버렸다.

성기수의 당초 관심은 유체역학의 「나비에-스톡스 방정식(Navier-Stokes equation)」에 관한 것이었다.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은 점성(粘性:유체나 기체의 내부마찰력)을 갖고 움직이는 물체(流體)에 대해서, 힘과 가속도의 관계를 정의한 유체역학의 기본 운동방정식. 성기수는 이미 서울대 시절부터 이 방정식에 고온, 고압, 극초음속 등의 상황에 대비한 수정식(修整式)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을 1년내에 수정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새로운 연구분야로 각광받던 MHD는 학위 논문주제로서 최적격이었다. 극초음속으로 움직이는 유체가 전도성(傳導性)을 갖는 물질일 경우 유체의 운동은 전기장(電氣場)이나 자기장(磁氣場)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의 역학관계를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MHD이다. 성기수는 초음속 항공기의 동체나 날개와 같은 유선형 물체 주위에서 발생하는 MHD흐름에 대한 해법을 완성해 보고 싶었다.

MHD는 특히 우주선과 같은 초음속항공기 제작에 가장 기초적인 학문으로서 당시로서는 미개척 분야에 속했지만 가열되기 시작한 미, 소(美蘇)간 우주 개발경쟁으로 각계에서 연구비 지원이 잇따르던 최첨단 분야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MHD 강의가 하필, 지난 가을학기 내내 피해 다녔던 브라이슨(Bryson, Arthur) 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강신청할 당시만해도 워낙 의기충천해 있던 터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개강일이 다가오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며칠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 수강신청 전이었다면 논문 주제를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브라이슨 교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고 악연이라면 악연이었다. 성기수가 브라이슨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8개월 전인 61년 5월 말, 석사과정 첫 봄학기가 거의 끝나면서 서머잡(Summer Job)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일반 학교의 여름방학 기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서머잡은 미국 대학원생들에게 전공공부도 하면서 부족한 학비를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어느 날 동료학생들이 어떤 서머잡으로 가게 됐느냐를 물었을 때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성기수는 당황했다. 하버드 측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은 연간 9개월 치 학비와 생활비에 해당되는 것 뿐이었고 여름방학에 해당되는 3개월 치의 돈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전년도 크리스마스 이전에 모든 서머잡이 결정돼 버린 상황이었다. 알았다 하더라도 다음해 봄 학기에 입학한 성기수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노릇이었다. 학기 중에 편입한 유학생들이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을 또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평소 친했던 한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해서 소개받은 사람이 바로 브라이슨 교수였다. 한번도 강의를 들은 적이 없는 생면부지였지만 성기수는 용기를 내서 브라이슨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소개하고 방문목적을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브라이슨 교수의 눈빛이 빛났다.

놀랍게도 브라이슨 교수는 2년 전 성기수가 하버드 입학원서를 직접 심사해서 학교당국에 그의 입학을 적극 추천했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항공우주과학 학술지 「Journal of The Aero/Space Science」에 실렸던 성기수의 논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성기수가 함께 가져간 서울대 성적 등본을 훑어본 브라이슨 교수는 자신의 프로젝트 수행에 필요한 고속카메라를 설계할 수 있겠다며 즉석에서 연구조수 채용의사를 밝혔다. 학부에서 이수했던 비행기 설계라는 과목을 눈여겨 보았음 직했다. 하지만 브라이슨 교수의 말을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은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겨우 알아들은 고속카메라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비행기 설계 과목을 이수하기는 했지만 50년대 말 당시 서울대의 강의 자체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설명하려고 더듬거리는데 브라이슨 교수가 성기수의 귀를 번쩍 트이게 하는 말을 했다. 고속카메라 설계연구에 참여하겠다면 월 5백 달러씩의 급료에 3개월간을 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하버드대학원의 1년간 학비가 2천 달러 정도였으니 석 달 동안에 1천5백 달러를 벌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성기수는 브라이슨 교수를 향해 신들린 사람처럼 「Yes! I will do it!」을 외쳐댔다. <다음주 목요일에 계속>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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