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353)

가짜전보로 청국의 군사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원세개는 이튿날 직접 조선의 국왕을 알현하고 『청국 대군이 오기 전에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속히 숙청하여 편이하게 일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위협하였다.

가짜전보의 위협에 국왕과 왕비는 크게 당황하여 영의정 등과 긴급히 상의한 다음 그들을 직접 원세개에게 보내어 변명하게 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정책은 국왕 및 정부대관이 전혀 아는 바 없고 반드시 간사한 못된 무리들의 협작이요, 문서와 국새 등은 위조일 것이라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관련자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고 또 러시아 공관에서 문제의 문서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1886년 7월 17일 사건의 연루자를 귀양보내야 했는데 당시 귀양간 사람 중에는 김학우란 이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전신기술을 익혀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 시설인 서로전선 가설에도 참가한 사람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어 러시아 공사관에 문제의 문서반환을 교섭하였으나 위베르 러시아 공사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부인하고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배된 사람들에 대하여 타국의 간섭을 받아 무죄한 사람들을 벌주는 법도 있느냐는 조회문을 발송해왔다.

원세개는 같은 해 7월 21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내어 조선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대원군 세력을 끌어들여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추진하기 위한 청원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당시 원세개가 이처럼 절대적인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통신의 장악이었다. 원세개는 사건이 나기 바로 전 해인 1885년 가설되어 인천과 서울-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고 의주에서 청국의 봉황성까지 연접되어 있던 통신선로를 자신들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통신, 즉 전신선을 활용하여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정보를 신속히 보고하고 조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며, 가짜전보까지 조작하여 조선의 국왕을 갈아치우려는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짜전보를 통해 가짜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의 국왕을 폐위시키려한 원세개.

김지호 실장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많이 변해 있었다. 통신에 관한 한 이제 중국의 통신현대화사업을 당당하게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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