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중에 'virtual'이라는 단어만큼 재미있는 단어도 드물다. 이 단어는 '실재의' '~와 다름없는'이라는 뜻을 가짐으로써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의미도 나타냄과 동시에, 소프트웨어에 존재하지만 물리적 실체는 없다는 뜻도 함께 가진다. 후자는 '가상' '가상의'라는 단어로 번역되는데 요즘 메타버스 열풍과 함께 각광받는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이라는 단어도 가상의 실재라는, 어떻게 보면 참으로 모순되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요즘에는 '가상'이라고 해서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가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강렬히 나타낸다. 전통적 '실체'의 의미가 이제는 물리적 형체를 전제하지 않는 인식 속 대상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렇게 인식을 기준으로 실재성을 판단하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대상에는 데이터로 재현된 인간의 정신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지인과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메타버스로 들어가 여러 체험을 함께 하다 보면 오프라인 공간에서 그를 만났을 때 하는 몸짓과 말투가 온라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가상 존재와 실체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온라인상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비대면으로 연애하다가 마침내 상대를 오프라인으로 만난 사람들은 의외의 실망을 하기도 한다. 인식과 물리적 실재의 불일치는 사람들에게 환멸과 좌절을 일으킨다.
한편으로는 가상 존재와 실재를 일치시키기 위해 메타버스 공간에 온라인 복제품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디지털트윈(디지털쌍둥이)이다. 예를 들어 공장을 디지털공간에 복원해 놓으면 굳이 비싼 원자재를 직접 사다가 생산라인에 넣지 않고도 어떤 제품이 나올지 가상공간에서 미리 볼 수 있다. 이것은 물리·화학적 성질까지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기법의 승리이자 예전에는 슈퍼컴퓨터에나 들어가던 고성능 칩이 개인용 PC에 장착되는 하드웨어 발전에도 힘입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신도 온라인에 온전히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 기술의 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또는 뇌-기계 인터페이스라고 지칭되는 기술 발달로 이제는 사람이 생각을 컴퓨터에 직접 전달하는 것이 점점 현실화 되고 있다. 이렇게 컴퓨터에 전달된 사람 생각을 저장하고 그 패턴을 학습해 실제로 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복제하게 된다면 인간의 디지털쌍둥이가 결코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닐 것이다. 아직 사람 기억까지 인출해 복제하는 것은 어렵지만 두뇌의 다양한 활동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술이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으므로 기억의 영역에 대한 도전 역시 점차 이뤄질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은 VR 얘기를 하다가 디지털쌍둥이까지 와버렸다. 가상이 가짜가 아니고 실재가 꼭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을 수 있는 시대다. 오프라인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구경하려고 카타르까지 가기는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선수로 변신해 온라인 축구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에스파나 뉴진스, BTS 등 대중음악 스타도 각 멤버의 아바타와 함께 활동하는 시대가 됐다. 물리적 형체가 없어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수용되기만 하면 바로 실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의 시대에 적응할 준비가 돼 있는가. 독자 여러분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묻고 싶다.
김장현 성균관대 교수 alohakim@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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