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디지털 정부 선도국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2026년 공공부문 인공지능(AI) 도입 예산은 3000억원 시대를 앞두고 있다. 'AI 3대 강국'이라는 깃발 아래 전국 곳곳에서 공공 인공지능대전환(AX) 프로젝트가 쏟아진다. 하지만 화려한 잔칫상 뒤편에서 필자는 지울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다. 우리는 혹시 과거의 '시스템 구축'이라는 낡은 부대에 'AI'라는 새 술을 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필자는 최근 해외 세미나에서 한국 사례를 발표하며 '실증 사업의 순환 함정(Pilot Purgatory)'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수많은 사업이 시범 단계에서는 혁신적이라 칭송받으며 화려한 보고서로 남지만, 정작 실제 운영 현장으로 안착하지 못한 채 실증의 단계에만 머물다 사라지곤 하는 현상을 뜻한다. 이미 AI 실증 사례는 역대 정부를 통틀어 100여건에 달하지만, 우리 삶을 실질적으로 바꾼 서비스는 손에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함정이 반복되는 가장 큰 원인은 AI 사업의 본질적 특성인 불확실성과 진화적 성격이 공공 조달 및 관리 체계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한 번 만들면 끝나는 완성재가 아니라, 데이터를 학습하며 성능이 개선되는 '성장형 생태계'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이 과거 시스템 통합(SI) 방식인 단기 구축 프레임에 갇혀 있다. 발주 기관은 명확한 문제 정의보다 기술 도입 자체에 매몰되고, 사업자는 솔루션을 도출해도 지원 기간이 끝나면 운영 동력을 잃는다. AI는 구축보다 운영과 데이터 학습을 통한 지속적인 개선이 생명임에도,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연결고리는 부족한 실정이다.
기술과 현장의 구조적 불협화음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우리의 사업 방식은 기관은 '문제 제기자'로, 사업자는 '공급자'로 분리돼 있다. 하지만 AI는 표피적인 이해만으로 성과를 낼 수 없다. 세계적인 AI 기업 팔란티어(Palantir Technologies)를 보자. 범죄·안전 분야의 거브테크(GovTech) 기업으로 시작해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비결은 단순히 기술력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공공기관과 깊은 파트너십을 맺고 현장의 맥락(Context)을 그 누구보다 깊이 파고들었다. 그간 찾아내지 못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도출해냈기에 기술이 아닌 성과로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수요자와 공급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심도 있는 동반자 관계와 공동의 책임감이다.
결국 현장의 맥락과 결합하지 못한 채 정체된 기술은 우리가 기대했던 혁신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아쉬운 결과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제 공공 AX는 일회성 기술 이식에 그치는 구축 또는 도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현장의 난제를 끝까지 추적하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진화의 패러다임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그 시작은 도입 건수나 일자리 창출 같은 뻔한 숫자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해당 솔루션이 현장의 문제를 얼마나 날카롭게 해결했는지, 그리고 해외 시장에 내놔도 손색없는 '작품'인지를 따지는 질적 가치가 우선이다. 공공 사업이 단순히 기업의 일회성 납품 구조에 그쳐서도 안 된다. 공공에서의 성공 경험이 기업의 핵심 포트폴리오가 되고, 이것이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형태로 패키징돼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징검다리가 돼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실패의 기록(Lessons Learned)'을 국가 자산으로 삼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성공 사례 홍보에는 능숙하지만, 무엇이 안 됐고 왜 힘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에는 인색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도입 과정에서 겪은 기술적·데이터적 한계와 조직 내 소통의 난관, 제도적 걸림돌 등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공유할 때, 비로소 다음 사업은 순환의 함정을 넘어 실질적인 성과로 향할 수 있다.
'세계 1위 AI 정부'가 실현된다고 해서 글로벌 거브테크 시장의 승권이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이제 '한 번 도입해봤다'는 식의 실적 쌓기는 그만하자. 공공 AX가 우리 AI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의 땅이 되어야 한다. 실증 사업의 순환 함정을 탈출하는 순간, 대한민국 AI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될 것이다.
김숙경 KAIST 기술경영학부 초빙교수 bigcandy@kaist.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