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위주로 발전한 대만 반도체 산업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삼성전자도 애플, AMD, 엔비디아, 인텔, 퀄컴 등 대형 고객사 위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업체 대상으로 영업해 왔다. 문제는 이런 대형 고객사도 시장에서 검증된 시스템 반도체용 임베디드 소프트웨어(SW)와 설계자산(IP)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에 내장되는 IP와 SW는 위험을 감수할 용감한 중소기업에 의해 확보된다. 대기업의 경우 양산할 때 문제가 발생하면 위험이 너무 크고 손해가 막심해서 새로운 IP를 채용하기가 어렵게 된다. 반면에 중소기업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면 파운드리는 검증된 IP와 구동 SW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즉 시장 유연성을 갖춘 중소기업이 반도체 공정 개선 과정에서 생산 수율 개선, 소비 전력 절감, 속도와 온도 안정성 확보 등을 점진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반도체 파운드리 산업도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기업이 사용하기에 앞서 파운드리 IP와 공정을 여러 차례 검증하는 중소 팹리스 확보가 중요하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갖춰야 할 최우선 전략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다툼으로 팹리스 시장 환경도 바뀌고 있다. 우리 팹리스는 14나노 이하 첨단 공정에서도 중국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역시 3나노 미세 공정 양산에 들어갔다. 당장 부족한 IP나 수율, 소비전력, 속도 등 공정 라이브러리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회 속에서 팹리스와 파운드리는 어떤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할까.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뛰어난 지략 덕분이다. 그러나 전략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화포와 거북선 같은 신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인공지능 반도체칩 개발은 천문학적 개발비가 필요하다. 팹리스 반도체 전쟁도 개발비를 공유할 수 있는 '멀티프로젝트칩'(MPC) 같은 신개념을 도입하면 메모리 수준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MPC와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는 여러 회사가 참여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시양산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MPW는 웨이퍼 한 장에 여러 회사의 반도체가 들어가게 되는 구조인 반면 MPC는 한 장의 웨이퍼에 여러 회사의 설계물이 한 개 칩 형태로 들어간다.
MPW는 웨이퍼 한 장에 100~200여개의 칩을 생산, 시양산 효율이 높지 않다. MPC는 싱글런 기준으로 한 장의 웨이퍼에 몇 백에서 몇 천개 칩을 만들 수 있어 생산성이 높다. 높은 시양산 효율은 시장 반응을 여러 고객과 충분히 검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신뢰성 검사를 본양산 전에 확인할 수 있어 기술·영업적 측면에서 MPC에 참여하는 회사에 유리하다.
반도체 시제품 개발이 중요하다는 착각이 만연하지만 이 또한 개발의 시작에 불과하다. 진정한 개발은 10번 정도의 설계 리비전과 시장에서 제품을 10만~100만개 정도 선보여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해야 한다. 영업 라인을 구축하고 홍보하며 경쟁자 동향을 파악하는 과정도 이뤄져야 한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인공지능(AI) 반도체는 규격이 변경되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MPC로 시제품 개발 시간을 단축하고 나머지 시간과 비용을 진정으로 중요한 AI 반도체 응용 애플리케이션 확보에 투자할 수 있다.
AI 반도체가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파급되는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자율주행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고 가사노동, 편의점 아르바이트, 음식점 서빙, 요리, 택배, 국방, 실버산업 등 다양한 산업에서 AI 반도체가 미칠 파급력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런 완성품 시장을 공략하고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은 국가 운명을 좌우할 기술이다.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공이 D램 등 메모리 산업이었다면 우리 미래 세대는 AI 반도체를 기초로 한 고성능 완제품 개발이 아닐까. MPC는 AI 반도체 개발을 최적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될 수 있다.
이효승 한국팹리스산업협회 부운영위원장(네오와인 대표) godinus@neow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