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가격의 'RISC-V' 등장
표준 제약 덜한 신시장 입지 확보
업계 1위 ARM, 사용료 인하 결단
설계업체, 개발 진입장벽 완화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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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업계에 '오픈소스'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 설계 자산(IP) 회사 ARM이 자사 반도체 설계 포트폴리오를 저렴한 값에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놓는가 하면, 최근 국내에서는 중소벤처기업부와 협력해 국내 시스템반도체 설계 업체가 무료로 ARM 솔루션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ARM의 움직임은 최근 칩 설계 업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RISC-V(리스크-파이브)' 중심 오픈소스 플랫폼을 의식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한 이 오픈소스는 저렴한 가격, 용이한 확장성으로 상당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삼성전자, 구글, 알리바바, 퀄컴 등 내로라하는 정보기술(IT) 기업이 주목하면서 시장 덩치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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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진입 장벽 대폭 낮추는 ARM…기존과 다른 행보

ARM은 명령어집합구조(ISA)와 다양한 설계 IP를 반도체 설계회사에게 판매한다. ISA는 중앙처리장치(CPU) 속에서 '일꾼' 역할을 하는 코어가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언어다. 설계회사는 ARM이 개발한 명령어 꾸러미를 바탕으로 칩의 설계도면 격인 마이크로 아키텍처를 만들어낸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처리해야 할 정보가 늘어나면서, ARM은 복잡하고 고도화한 명령어로 구성된 A시리즈, 중·보급형 명령어로 구성된 R, M시리즈 등을 각각 선보여 왔다. ARM은 특히 모바일 칩용 ISA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보유했다. 독보적 기술로 설계회사에 값비싼 ISA 사용료를 받으면서도 오랜 기간 시장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내외에서 ARM의 행보가 달라졌다. 값비싼 사용료와 로열티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하던 ARM이 자사 반도체 솔루션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추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ARM이 시작한 '플렉시블 액세스'가 대표적인 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칩에 필요한 회사의 IP를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ARM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플렉시블 액세스 포 스타트업'이라는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신생 설계업체들이 ARM IP에 아예 무료로 접근할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춘 것이다. 이 프로그램으로 중소벤처기업부와도 협력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IP 사용료로 막대한 이윤을 남긴 ARM이 이런 전략을 시도하는 주요한 이유로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트렌드'가 된 RISC-V의 등장을 꼽고 있다.

◇저렴한 비용과 확장성…RISC-V “택하지 않을 이유 없다”

새로운 ISA인 RISC-V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UC 버클리대학교에서 연구용으로 쓰였던 명령어 집합 'RISC-Ⅰ'이었는데, 2010년부터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내로라하는 칩 설계 업체들이 주목하는 IP가 됐다.

ARM IP와 비교해 RISC-V가 가진 최대 장점은 '오픈소스'다. 높은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ARM의 IP와 달리, 인터넷이나 RISC-V 재단 웹사이트를 검색하면 금방 등장하는 소스를 활용하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칩을 설계할 수 있다.

RISC-V의 또 다른 장점은 칩 기능 확장을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상 ARM IP를 기반으로 칩을 설계할 경우, 칩 기능을 업그레이드하는 추가 명령어를 더 넣고 싶을 때 반드시 ARM의 아키텍처 라이선스를 구매해야만 한다.

그러나 RISC-V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본 ISA에 사용자가 원하는 명령어를 마음껏 추가할 수 있다. 저렴한 비용으로도 칩 확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저마다 계획한 '맞춤 칩'을 설계할 수 있어 고사양·저전력 칩을 개발하는 데도 상당히 용이하다. RISC-V 기반으로 개발된 칩이 ARM 기반 칩과 비교해 성능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매력이다.

전문가들은 RISC-V의 ISA 수준이 ARM 최상위 제품군인 ARM 코어텍스-A55 시리즈까지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2010년 이후 사물인터넷(IoT), 증강현실(AR), 웨어러블 환경 조성으로 새로운 IT 시장이 창출된 점도 RISC-V가 주목받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다. 아직 표준 제약이 덜한 신규 시장에서 새롭고 저렴한 RISC-V로 칩 설계에 도전해보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김지훈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는 “서버와 PC용 CPU는 x86, 스마트폰 AP는 ARM이 지배했지만, 초저전력 컴퓨팅에서부터 고성능 컴퓨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RISC-V가 충분히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관련 산업계 및 연구계가 크게 주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RISC-V는 신생 칩 설계업체뿐 아니라 삼성전자, 구글, 퀄컴, 엔비디아, 웨스턴디지털 등 굵직한 반도체 대기업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저전력 칩을 개발하기 위한 스위스 취리히공과대학의 펄프(PULP)라는 조직도 RISC-V를 활용한 아키텍처를 적극 개발 중인데, 네덜란드 NXP, 미국 구글,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유력 IT 기업들과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오픈소스 트렌드에 설계업체들은 '쾌재'

RISC-V의 등장과 가파른 성장으로 ARM 위주 생태계에 균열이 가면서, 회사는 고객사 유지·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RISC-V서 시작된 오픈소스화로 설계업체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IP 시장 내에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발생하면서 비용 절감과 혁신의 기회를 동시에 잡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시스템온칩(SoC) 개발 접근성이 좋아지고 있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RISC-V의 성장이 고무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ARM 제품은 안정성과 편의성 면에서 상당히 앞서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국내 팹리스 업체 고위 관계자는 “RISC-V의 성장 가능성은 상당히 크지만, 자동차용 CPU 등 높은 신뢰도를 요구하는 다소 보수적인 시장은 ARM 개발환경을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RISC-V 활용 사례가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전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