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다. 단 위기에 대비해 온 사람에게만 그렇다.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정부 관계자를 만나면 항상 '장비·소재 등 생산 기반 기술은 언제든지 경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해 왔다. 수십 년 동안 산업기술을 연구개발(R&D)하면서 선진국과 후발국을 비교하며 깨달은 '우려의 가능성'이 눈앞의 현실이 됐다.
일본이 지난 4일부터 한국 기업 대상으로 수출 규제를 시행하는 품목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 공정에 필요한 포토레지스트, 고순도불화수소, 폴리이미드 등 세 가지다. 반도체 장비를 연구하던 1990년대 말부터 국내 화학회사들이 반도체 공정의 핵심 기술 국산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지켜봤지만 일본을 뛰어넘는 기술은 확보하지 못했다. 20~30년에 걸쳐 축적한 기술과 인프라가 있어야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일본이 제조 강국의 명맥을 이어 온 것도 그런 이유다.
정부가 이 위기에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겠지만 원천 기술 보유가 근본 대책이다. 산업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자 입장에서 이 위기 극복에 필요한 것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 번째 장기 안목의 비전 제시다. 한국공학한림원이 최근 발표한 한국경제 현황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주력 산업 구조를 개편해서 새로운 산업을 열고, 정부가 이를 위한 여건을 발 빠르게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부가 가치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육성해서 선진국형 제조업 구조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특정 완성품 생산 회사에 종속되지 않고 수직 계열화를 넘나드는, '기반 기술'이 강한 2·3차 벤더를 집중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전제품, 자동차, 스마트폰 등 완성품 산업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데는 유효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전제품 시장의 주도권이 미국, 독일이나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이동했지만 이제는 중국으로 옮겨 가며 우리나라 기업의 속을 태우고 있다. 반면 독일이나 일본은 완성품 산업의 주도권을 빼앗겨도 완성품에 필요한 소재, 부품과 장비에 자신들의 세계 최고 기술이 녹아 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기술은 '공통 기술'로 신산업 발굴과 육성에도 활용돼 경쟁우위를 이어 갈 공산이 크다.
둘째 정부의 흔들림 없는 지원이다. 기간산업의 필수 요소인 소재부품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투자는 부품소재기업지원사업, 신뢰성기반기술확산사업 등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지속됐다. 정부는 3일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브리핑에서 '소재·부품특별법'을 '소재부품장비특별법'으로 확대 개정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소재〃부품 특별법 종료를 앞두고 고심한 결과물이다.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해 기존의 중간재 핵심 소재와 부품뿐만 아니라 장비까지 국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내년부터 매년 1조원을 집중 투자하겠다는 흔들림 없는 정책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마지막은 기회를 잡을 의지, 즉 절박함이다. 많은 전문가가 오랫동안 산업 구조 개편과 기반 기술 투자를 강조해 왔다. 이번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를 계기로 국민들도 이런 문제의식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기술 개발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자 '이번에는 정말 우리 산업의 체질을 한번 바꿔 보자'고 힘을 모으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비롯한 연구기관은 국가 차원의 필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책임감 있게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이러한 장기 비전과 정부의 흔들림 없는 정책이 세워졌다면 이 절박함으로 주저 없이 나아가면 된다. 다시 신발 끈을 묶을 때다.
박천홍 한국기계연구원 원장 pch657@kim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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