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大選)정국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2002년 7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의정부 마지막 개각을 단행했다.
김 대통령은 신임 국무총리 서리에 장상 이화여대 총장(현 WCC 아시아지역 회장)을 지명하고 정보통신부 장관에 이상철 KT 사장(광운대 총장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회장)을 임명했다. 법무부 장관에는 김정길 전 법무부 장관(현 변호사), 국방부 장관에 이준 전 KT 사장, 문화관광부 장관에 김성재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현 김대중도서관장), 보건복지부 장관에 김성호 조달청장(현 바른사회공헌포럼 공동대표)을 임명하는 등 장관 7명을 교체했다.

이날 개각은 두 가지 면에서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장상 총리 서리였다. 그는 헌정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 후보였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현 민주당 국회의원)은 개각 발표를 통해 “21세기는 여성이 국운을 좌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를 발탁했다”면서 “장상 총리 서리는 학자이자 교육자이면서 대학 총장을 역임, 경영마인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내각을 효율적으로 이끌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두 번째는 전·현직 KT 사장의 장관 발탁이었다. 김영삼정부에서 KT 사장을 지낸 이준 국방개혁위원장은 국방부 장관에, 이상철 현 KT 사장이 정통부 장관에 각각 임명된 점이다. KT 출신이 동시에 2개 부처에 입각한 일은 처음이었다.
이상철 신임 정통부 장관은 개각 당일 아침 TV를 보다가 자신의 입각 사실을 알았다.
당시 그는 KT 거제도 수련관 개관식에 참석하가 위해 거제에 내려가 있었다.
이 장관의 회고.
“개관식 시작이 9시 30분이라 잠시 TV 뉴스를 보고 있는데 정통부 장관에 내 이름이 나오더군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거제도는 자동차로 서울과 가장 먼 곳이었어요. 행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나로 인해 청와대 임명장 수여식이 오후로 늦춰졌어요.”
개각 발표 2주전 어느 날, 그는 김진표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경제, 교육부총리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 뜻인데 내각에서 일할 생각이 있습니까.”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장관을 하셔야죠.”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청와대는 오래 전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안병엽 전 장관(현 KAIST 초빙교수)의 말.
“장관 재임 시절 김 대통령이 내게 `이상철 사장의 인물 됨됨이가 어떠냐`고 묻곤 했어요. 그건 대통령이 평소 관심을 갖고 그를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 청와대 2층 세종실에서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신임 각료들은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이들과 각각 기념촬영을 했다.
김 대통령은 임명장을 준 후 “국민의정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무리를 잘해달라”면서 “한국 IT가 더 발전하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장관은 임명장을 받은 후 오후 4시 KT에서 이임식을 하고 다시 오후 5시 정통부 14층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쁜 일정이었다.
이 장관은 취임사에서 “우리나라는 월드컵을 통해 세계 전역에 IT강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세계 IT 선도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국내 경제발전의 성장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의 말.
“나는 평소 취임사를 별도로 작성하지 않았어요. 90%는 연설로 하고 5%는 요점만 정리해 이야기를 했어요. 심지어 국정감사에서도 즉문즉답을 해 오전 질의에 대해 오후에 답변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정통부 국장들이 답변 자료를 만들 필요가 없어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에 앞서 양승택 전 장관(현 IST 회장)은 개각발표 하루 전인 7월 10일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다”는 경질 전화를 받았다.
양 장관은 11일 오전 11시 이임식을 갖고 정통부를 떠났다.
양 장관의 경질 통보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해 2월 초 청와대의 해임 통보를 받아 이임 준비를 하던 중 통보가 잘못이라는 연락이 와 다시 짐을 풀었다. 그 바람에 정통부는 장관 이임식 준비로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양 전 장관의 증언.
“어느 날 아침 8시께 출근하는데 이상주 청와대 비서실장(교육부총리 역임)이 전화를 해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해요. 경질 통보였어요. 장관실에 도착해 비서관에게 이임 준비를 지시했어요. 박지원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에게 `이제 그만두게 됐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전화를 했더니 `그게 무슨 소리냐, 뭔가 잘못됐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해요. 30분쯤 후 박 수석이 전화로 `비서실장이 잘못 알고 전화를 한 것이니 계속 장관직을 수행하라`는 대통령의 말씀을 전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양 전 장관은 이후 동명대 총장을 역임했다. 양 전 장관이 동명대 총장으로 가는 데는 양 장관과 친분이 두터운 김호용 한샤인인터내셔널 회장이 중간 역할을 했다.
이상철 장관은 1948년생으로 경기고·서울대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버지니아 폴리테크닉주립대에서 석사학위, 듀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후 그는 6년간 미국에서 일했다. 처음 3년간은 미 항공우주국(NASA)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나머지 3년은 국방부 일을 전담하는 회사에서 근무했다. 1주일에 서너 번씩 국방부에 드나들었다. 주로 미사일 지휘통제. 군 위성통신 시뮬레이션, 미 잠수함 ELF 통신시스템 등 무선 분야를 모두 연구해 이 분야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그는 1982년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ADD) 통신체계실장으로 국내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귀국은 둘째 형인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 전 장관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합참본부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한 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88년 국방부 장관에 올랐다. 당시 이 전 장관은 별 두개로 육본 작전참모부장이었다.
이 장관의 증언.
“형님이 너도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여서 시민권을 버리고 귀국했습니다. ADD 대우는 미국의 4분의 1에 불과했어요.”
그는 ADD에서 차기 FM 무전기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 세 번째이자 국내 첫 개발이었다. 이 제품은 도청과 재밍(jamming)이 불가능해 미국산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이 제품을 지금도 군에서 사용 중이다. 그는 이어 차기 전술통제, 차기 전술통신체계를 확립했다. 군 통신혁명을 주도하다 보니 그의 별명이 `차차차`로 불렸다.
제품 개발과 관련해 그는 무기중개상의 음해와 투서로 감사원 감사를 받기도 했다. 모두 무혐의로 드러났지만 당시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무전기 개발과 관련해 정호용 당시 국방부 장관(내무부 장관 역임)과 담판을 벌인 일은 두고두고 널리 회자됐다. 정 장관이 일부 인사의 말만 듣고 `무전기 개발을 중지하라`고 지시하자 그는 장관 면담을 신청해 `개발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소상히 설명했다. 정 장관은 그의 능력과 소신을 인정해 “이 박사 개발을 빨리해”라며 그의 손을 들어 줬다.
그는 1991년 한국통신으로 자리를 옮겨 통신망연구소장, 사업개발단장, 무선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증언.
“아이들 교육 때문에 가족과 3년을 떨어져 지냈어요. 저는 대전에서 생활했는데 마침 KT에 자리가 나 옮긴 것입니다. 김성진 ADD 소장(체신부·과기부 장관 역임)이 내게 `이 박사는 국가의 네트워크를 해야 할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그 의미를 알겠어요. 군에서 무선을 하다가 KT에서 통신망연구소장을 했잖아요.”
그러다가 1996년에는 KTF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사훈을 자유인으로 정했다.
규정집도 KT의 10분의 1로 줄여 만들었다. 그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빌 게이츠에게 투자를 권유해 2000년 1월 초 일주일 만에 MS에서 2억달러, 퀄컴에서 2억달러, 캐나다 연기금에서 2억달러를 투자받아 KTF가 18일간 상한가를 기록해 경영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2000년 4·13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차출돼 경기 성남 분당을 지역구에 출마했다. 선전했으나 한나라당 임태희 후보(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119안전재단 이사장)에게 고배를 마셨다.
이 장관의 증언.
“신선한 인물을 내세워야 한나라당 텃밭에서 이길 수 있다면서 청와대와 당이 나를 공천했다고 해요. 안 나간다고 버티다 할 수 없이 나갔어요. 선거 35일 전인데 시베리아 허허벌판에 선 느낌이었어요. 낙선하고 임 의원 사무실로 찾아가 축하해줬어요. 낙선자에게서 인사받기는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이후 이계철 사장(방송통신위원장 역임)의 뒤를 이어 2000년 12월 한국통신 최연소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기존의 관행을 벗어난 파격적인 경영으로 주목받았다.
사원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경영에 반영하기 위해 `청년중역회의`를 구성해 운영했다.
그는 2001년 6월 9일 114를 KT에서 분사했다. 114는 매년 적자를 냈다. 경영합리화를 위해 분사를 추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직원들이 60일간 KT 본사에서 농성을 했다. 사장실 앞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명숙 당시 여성부 장관(국무총리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과 이태복 청와대 복지노동수석(복지부 장관 역임), 그리고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까지 분사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서 멈추면 KT 민영화는 절대 못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114 분사를 관철시켰다. KT 노사는 고용보장과 주식 배정, 임금 삭감 등에 합의해 KTcs와 KTis 두 개 기업으로 분사했다. 이 기업은 KT가 지분 19%, 나머지는 사원이 주식을 보유하는 사원지주회사로 출범했다. 출발은 쉽지 않았지만 결과는 좋았다.
그는 초고속인터넷 모뎀 가격을 당시 60만원에서 15만9000원으로 내려 처음 목표 60만 가입자를 1100만명으로 늘렸다. 이런 그를 주위에서는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자라는 의미에서 `테크노 CEO`라고 불렀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