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84·끝〉'개혁중의 개혁' 금융실명제, 전격 닻 올렸다

YS, 1993년 8월 12일 특별담화 “신한국 가는 고빗길”
비실명 자산 인출금지·금융거래 비밀보장 강화 등 담겨
비밀리에 실무 작업팀 꾸려…준비기간 2개월 속전속결
'내용 새나가면 해임' '창문가 서지 말라' 보안수칙 엄수
사전에 전산화 등 철저하게 준비…시행 이후 혼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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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8월 12일 청와대에서 금융실명제 관련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제공〉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조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 명령을 발표합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습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개혁중의 개혁'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의 한 장면이었다.

담화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이었다. '목요일 저녁의 대충격'이었다. △실명거래 의무화 △비실명 자산 인출금지 △금융거래 비밀보장 강화 등이었다. 검은 돈을 봉쇄하고 금융 혁명을 이룩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담겼다.

담화문 발표장에는 황인성 국무총리를 비롯한 이경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전 국무위원이 배석했다.

“금용실명제는 개혁 중의 개혁이요, 우리 시대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입니다.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통령 긴급제정경제명령은 깨끗한 사회로 가기 위한 필수 제도개혁입니다. 지하경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금융실명제는 신한국으로 가는 데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빗길입니다.”

김 대통령은 12분간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배석한 국무위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황 총리와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전 국회의장)과 함께 회견장을 나갔다.

김 대통령은 이에 앞서 오후 7시 청와대 본관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 명령안을 의결했다. 국무회의에서는 홍재형 재무부장관의 긴급명령발동제안 설명과 최창윤 총무처 장관의 국회소집 요구 설명을 듣고 20여분 만에 종료했다.

금융실명제 도입은 1982년 전두환 정부에서 처음 시작했다. 잠시 그 과정을 살펴보자.

전두환 정부는 1983년부터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는 방침 아래 1982년 9월 국회에서 금융실명제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정치권 등의 집요한 반대에 부딪쳐 계획대로 시행하지 못헀다. 급기야 국회는 1983년 12월 16일 전산화 등 행정 준비 상황과 경제 여건을 감안해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날로부터 금융실명제를 시행한다'는 단서를 달아 실행을 보류했다.

노태우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취임 후 1989년 4월 금융실명제 준비단을 구성해 1990년 4월부터 1년간 실명제 준비작업을 했다. 이 역시 전산화 미비와 경제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명제 시행을 중단했다.

한국 컴퓨터 산업 대부로 불리며 국내 처음으로 예산업무와 행정 전산화를 추진한 성기수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전산개발센터 소장(전 동명대 총장)은 이에 대해 정치권의 핑계라고 주장했다. 성 박사의 증언.

“1982년 7월 전두환 대통령 호출을 받고 청와대 소회의실에서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1983년 1월 1일부터 금융실명제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전산화는 기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정치권이 금융실명제를 하기 싫으니까 핑계를 댄 것입니다.”

두 번이나 좌초했던 금융실명제는 14대 대선 때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정주영 후보 등 이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런 탓에 문민정부 들어 금융실명제는 급물살을 탔다. 도입 선언 11년 만이었다.

김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인 1993년 3월 어느 날.

김 대통령이 박관용 비서실장을 찾았다.

“금융실명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공약이긴 하지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조급하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후 김 대통령이 박 실장에게 말했다.

“실명제는 극비로 추진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작업팀을 구성해 작업을 시작했어요.”

박 실장은 내심 깜짝 놀랐다.

“박재윤 경제수석(전 통상산업부 장관) 의견은 어떻습니까?”

“경제수석은 이 일을 몰라요. 청와대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박 실장뿐이요. 그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마시오.”

김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업무에서 박 수석을 배제했다. 박 실장이 재고를 요청했지만 김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금융실명제 작업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보안을 특별히 강조하는 김 대통령 스타일대로였다.

1993년 6월 22일 오전 7시 25분.

김 대통령이 이경식 부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단독 조찬을 하며 지시했다.

“금융실명제 추진 방안을 극비 보안 속에 마련하시오.”

이 부총리는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예. 알겠습니다.” 준비기간은 2개월로 잡았다.

이 부총리는 곧장 비밀리에 실무 작업팀을 구성했다. 준비 작업은 한편의 비밀 첩보영화 같았다. 이 부총리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양수길 박사 등 극소수 인사를 선발했다.

처음 작업은 이 부총리 자택에서 했다.

1993년 7월 8일 이 부총리는 실명제 초안을 마련했다. 나머지 작업은 재무부 몫이었다.

1993년 7월 12일. 김 대통령은 홍재형 재무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단독 조찬을 하면서 금융실명제 실시 방침을 밝혔다. 이 때도 김 대통령은 철저한 보안을 지시했다.

홍 장관은 곧장 준비팀을 구성했다. 남은 기간은 한 달여였다. 재무부 김용진 세제실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을 비롯해 김진표 세제심의관(전 국회의장), 진동수 해외투자 과장, 백운찬 사무관 등이었다.

재무부팀은 일단 과천 주공아파트 한 채를 두 달간 빌렸다. 이어 국세청과 법제처 직원과 은행 직원 등이 합류했다.

1993년 7월 하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극비 작전을 시작했다.

실무진에게 갑자기 40일간 해외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출장 지역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도시였다.

당시 관계자의 말.

“대도시로 출장가면 현지 주재관에게 연락할 수 있어 일부러 생소한 도시를 정했습니다.”

연극은 완벽했다. 이들은 실제 공항에 나가 직원과 가족들이 배웅하는 가운데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일본까지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비밀 아지트인 과천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절대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서를 썼다. '만약 내용이 새 나가면 해임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관문을 나갈수 없다' '창문가에 서지 말라' '전화를 삼가고 집에 전화할 경우 국제전화로 위장하라' 등 수칙도 엄수했다.

실명제 작업팀은 이 작업을 '남북통일작전'이라고 불렀다. 집주인에게는 대학교수들이 남북통일 용역 연구를 한다고 둘러댔다. 당시 삼복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폭염 속에서 이들은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했다.

1989년 7월 28일. 김 대통령은 황길수 법제처장을 청와대로 불러 금융실명제 시행 방침을 밝히고 “대통령 긴급명령에 따른 법조문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증언.

“금융실명제 준비작업을 아는 사람은 실무자를 제외하고는 나와 이경식 부총리, 홍재형 장관, 황길수 법제처장뿐이었다. 이들도 내가 언제 발표할지는 알지 못했다. 금융실명제 발표 이후 황인성 국무총리나 박관용 비서실장, 박재윤 경제수석 등이 섭섭함을 토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비밀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김영삼 회고록 상)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 이후 혼란은 없었다. 사전에 전산화 등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이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우리 생활에 투명 금융시대가 열렸다. 과학기술이 만든 새로운 금융 질서였다.

※ '이현덕 대기자의 과학기술이 미래다'는 이번 호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성원하고 애독해 주신 분들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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