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에서 ‘수읽기’는 기본이다. 수읽기란 ‘수의 변화를 읽는다’의 함축어다. 상대방이 둔 수의 의미를 해석하고 상응한 대응방법을 찾아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다. 흔히 전쟁터나 기업 경쟁에 비유되는 바둑판에서 전략 수립과 같은 뜻으로 통용된다.
프로기사와 아마추어의 큰 차이도 수읽기다. 이창호 9단과 같은 절정의 고수들은 1분 이내에 100여수를 내다볼 수 있다고 한다. 60초라는 짧은 시간 내에 100번의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다. 상대방이 내려놓는 한수마다 또 다른 변화를 예측하고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나무판에 열아홉 줄을 그어 생긴 361개 십자형에 흑백돌을 올려놓고 승부를 가리는 바둑경기가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도 수읽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흥미진지한 수읽기 판은 삼성전자와 애플간 특허전이다. 바둑 프로 9단들이 벌이는 경기와 버금간다. 애플이 특허 침해 소송을 첫수로 두면서 판이 시작됐다. 첫수에 대한 삼성의 수읽기는 빨랐다. 일주일 만에 전면 맞대응에 나섰다. 사전에 수를 읽고 있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주요 국가별로 삼성의 맞소송이 이어졌다. 이후 판매금지 조치에 다시 무효 소송까지 펼쳐지면서 주거니 받거니 형태로 굳어지고 있다.
애플은 또 다른 돌을 뒀다. 반도체 주 공급선을 삼성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 그러나 삼성은 이 수의 의미를 알았다. 마땅한 대처 방안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후였다. 허수였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삼성은 특허 전면전을 외치면서 한 켠에서는 부품 공급 협상을 진행했다. 당분간 부품 공급 대안책이 없다는 것을 애플도 인정했다. 2014년까지 삼성전자가 계속 공급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장기판이라면 애플이 부른 ‘장이요’에 삼성이 ‘멍이요’를 외치면서 다시 ‘장이요’를 부른 격이다.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이 ‘경쟁이자 협력관계’라는 미묘한 의미를 담은 말을 내놓으면서 부상한 것도 또 다른 수읽기로 평가된다.
양사 특허전은 초반전에 불과하다. 최소 3년 후를 내다보고 있다. 서로의 속내를 감추면서 장기전에 돌입하고 있다. 한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악수를 하고 있다. 진정한 수읽기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서동규기자 dk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