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정형문 에이템포 亞총괄 사장(3)

(3)사장 자리 걸고 지킨 제품 이미지

“영업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잊으려 애를 쓴다.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인격도 학식도 체면도 모두 버린 채 그저 공손히 고객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고, 사무실에 돌아 와서도 영업상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내근 혹은 기술 직원들에게도 고객 수준에 준하는 예의를 갖추려 애쓴다. 그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다만 얽힌 실타래 같이 꼬여있는 영업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풀어내어 수주까지 해야 하는 의무만 주어질 뿐이다.”

영업에 첫발을 내딘 후 내가 배운 영업의 ‘정석’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자존심 상하고 체면이 말이 아닌 상태에서 절박하게 ‘나’를 찾아보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옳은 건 반드시 옳다”는 진실이다.

경험 하나. 첫 직장에서 시스템엔지니어(SE)로 근무 하면서 장기간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1년여 동안 밤낮없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A 은행의 대리가 내 영업 대상 은행의 전산 책임자로 있었다. 나는 당시 S기업에서 영업을 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는 변해 있었다. 10여 년 전에 자기 업무를 도와 주던 IT 기업의 SE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자기는 고객, 그것도 전권을 가진 책임자라는 의식으로 무장돼 있고, 나를 마치 일개 뜨내기 장사치(그것도 처음 보는) 처럼 대했다.

동행했던 기술부 동료조차 무안해했던 상황을 수습해야했지만 그래도 당시 영업 아이템이었던 솔루션은 그 은행에 꼭 필요했던지라 시연(데모) 일정을 잡았다. 작업에 필요한 인력은 모두 4명. 2시간 전에 데모시스템을 갖추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기별조차 없이 세 시간이 흘렀다. 밤 7시, 너무 급한 일이 생겨서 그렇다고 내일 오전 8시에 볼 수 있느냐는 전화가 그제서야 왔다. 데모는 다음 날 오후 2시에야 실시됐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끊임 없는 반말, 이유 없는 트집과 벤더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투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태도에 격분하고 말았다. 난 그와 ‘갑과 을’이 아닌 보편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격론을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영업사원의 최대 특권이 뭔지 아십니까 ? 팔기 싫은 고객에겐 팔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뒷일은 내가 책임집니다. 나는 당신에게 물건을 팔지 않을 것이고, 내가 은행권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 당신은 누구로부터도 이 솔루션을 살 수 가 없습니다.”

두 달 뒤, 나는 그 은행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그 두 달간의 입씨름은 영업사원에게도 인격과 자존심이 있고, 필요한 물건은 필요한 사람에게 당당하게 팔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경험 둘. 1996년 여름이다. EMC코리아 전 직원이 20명도 되지 않던 초기 지사장으로 있었던 때다. B 재벌 그룹 계열사에서 재난복구 솔루션을 도입했는데, 경쟁사의 제품이 선정됐다. 가격이나 제품 경쟁력면에서 자신이 있었지만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임원이 어느 모임에서 “EMC 제품은 하자가 있어서 포기했다”는 말을 전해듣게 됐다. 당시 재난복구 솔루션 도입은 국내에선 거의 초창기였고, 제품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인을 통해 만들어진 만남에서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명확한 근거 없이 제품 이미지를 흔든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임원은 “다시 검토 할 테니 자료를 전부 가져와 보라”고 답했다. 나는 다시 답했다. “저라면 한번 내린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그렇게 쉽게 번복하지 않습니다. 그 결정이 권한 밖인데 무슨 소용이 있지요? 지친 직원들을 결과가 뻔한 게임에 다시 투입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선택하신 그 솔루션이 계획하신 날짜에 가동되면, 제가 EMC 사장 자리를 그 다음날 그만 두지요.”

그 솔루션은 그 후로도 거의 1년여를 ‘변칙적’으로 활용됐다. 또 무모하리만치 용기 있었던 대처가 고객들 사이에선 쉬쉬하며 퍼져 나가 결국 EMC 영업에 득이 됐고, 직원들에겐 ‘할말을 할 줄 아는 사장’으로 인정돼 후일에 팀워크와 상호 신뢰를 구축하는 데 큰 힘이 됐다.

몇 년 후 그 임원은 개인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그 사이 시장에서 입지를 굳힌 EMC 제품을 자기가 그 재벌사에 판매할 수 있는 협력업체가 될 수 없겠냐고 문의해 왔다.

hayward.jeong@ate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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