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 논설위원 jsuh@etnews.co.kr
북한이 윈도운용체계의 자국어(조선글) 버전을 개발한다면 남한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물론 이 문제는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거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관심 밖의 일이긴 했다.
북한에는 현재 약 30만대의 PC가 보급되어 있고 윈도95/98은 영문판에 조선글 표준 입출력프로그램(IME) 「단군4.8E」를 얹어 쓰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윈도를 여유있게 운영할 수 있는 펜티엄Ⅱ나 펜티엄Ⅲ급 PC의 보급은 평양정보쎈터와 같은 고급 연구기관으로 제한돼 있다.
윈도 원작자인 마이크소프트(MS)에서 볼 때 기술지원센터의 설립 등 엄청난 투자가 선행돼야 할 조선글 윈도 버전의 개발은 그 시장성이 극히 불투명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한이 최근 조선글 윈도를 직접 개발하겠다며 MS의 지원과 양해를 구하고 나섰다. 게다가 북한측은 MS가 조선글 윈도개발의 관건인 국가ID(Locale ID) 배정에 난색을 표하자 이에 대한 도움을 남한측에 요청해 왔다. 지난 2월 평양을 방문중이던 남한의 남북IT교류대표단에게 MS에 대한 설득을 정식으로 요청해온 것이다.
북한측의 의도야 어떻든 남한측으로서는 관심 밖의 일이 그야말로 「핫이슈」가 되어 돌아온 셈이다. 당시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북한은 MS가 국가ID를 제공할 경우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MS에 상업적 이득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이는 곧 MS의 거부가 바세나르협정이나 (미국의)대(對)테러지원국 제재대상과 관계없는, 『상업적 판단에 따른』 결과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이 이렇게까지 나온 것은 윈도95/98 환경에서는 그런대로 조선글 IME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난해 발표된 새 버전 「윈도2000프로페셔널」에서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북한 내부의 IT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북한의 요청을 수용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동안 추진해온 IT교류협력사업의 연장선상에서 검토해 볼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또한 같은 민족 입장에서 볼 때도 북한의 한차원 높은 정보화를 위해 남한이 MS 설득에 적극 나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의 지원요청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안은 결코 아니다. 민족이 화합하는 마당에 「독자노선」을 ●하는 윈도의 조선글화가 어떤 파장을 몰고 올 것인가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 과정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한글」과 「조선글」은 「훈민정음」, 가깝게는 1933년의 조선어학회 문법체계에 근거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자모배열 순서와 두음법칙의 운용 등 문법체계가 달라 사실상 별개의 언어로 규정돼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같은 차이가 실제 커뮤니케이션상에서 어떤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던 「한글」과 「조선글」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정보화와 함께 남북간 IT교류가 급진전되면서부터다. 일부 문법체계의 차이와 서로 다른 코드페이지가 IT환경에서는 호환불가라는 천형(天刑)의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표준워드프로세서 「창덕」과 남한의 「아래아한글」간에 문서호환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니까 조선글 윈도의 등장은 한마디로 「한글」과 「조선글」의 고착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IT교류에서도 그만큼의 추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윈도의 조선글화를 막자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그리고 IT교류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 또한 MS의 상업적 판단에 앞서서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논의해 보자는 얘기다. 필자는 이 글을 계기로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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