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기술이 전 세계 산업의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생성형 AI의 폭발적인 발전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거대한 데이터센터의 건설로 이어졌고, 이는 곧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수요의 급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하게 빛나는 AI 알고리즘의 이면에는 이 거대한 시스템을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묵묵한 조력자가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파 기술이다.
반도체 기술 발전의 핵심은 여러 개의 칩을 효율적으로 묶고 공간활용을 높이고 성능을 높이기 위해 반도체 칩을 위로 쌓아 올리는 패키징 기술이다. 핵심은 초고속 신호를 얼마나 손실 없이 효율적으로 서로 간섭을 일으키지 않고 전송하는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전자파 기술의 응용에 있다.
초고속 신호의 전자파 특성을 고려한 반도체 패키지의 공학적 설계는 반도체 시스템의 최종 성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능을 극대화한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전자파 기술의 중요성은 비단 반도체와 AI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K방산 기술과 우주항공 기술에서도 전자파 기술은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다. 레이더 시스템, 위성 통신, 유도 무기 등 첨단 국방·우주 산업의 근간이 모두 전자파 기술 위에 세워져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정작 학문과 연구 현장에서 전자파 관련 기술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점이다. 전자파 분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을 다루는데다, 대학에 입학해 전자기학, 미분방정식과 같은 상대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기초 과목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학생들이 처음에 다소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근간은, 눈앞의 유행에만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꾸준한 기초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반도체와 AI 시대에 전자파 기술이 다시 떠오르고 있는 현상 역시 기초 학문을 꾸준히 다져온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술의 인기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그 무수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꾸준함을 가지고 있는 기술 중 하나가 전자파 기술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는 항상 더 빠르고 좋은 성능을 원한다. 데이터를 더 많이, 더 빨리 보내기 위해서는 갈수록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주파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하드웨어를 설계하고 신호를 제어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주파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하드웨어 설계의 난이도가 극도로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전자파 기술의 수요는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해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때 전력전자와 제어 분야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낮아 기피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거대 데이터센터의 전력 효율 관리가 중요해지고, 로봇과 물리적 환경이 결합한 피지컬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력전자와 제어 분야의 인기는 다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과 젊은 연구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많은 이들이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며 지금 어떤 분야를 선택해야 유망할까에 골몰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분야를 선택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분야에서 얼마나 꾸준히, 열심히 노력했느냐다.
기술의 유행만 좇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은 결코 깊은 내공을 쌓을 수 없다. 반면, 당장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 꾸준히 파고든 사람은 그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가 된다. 그렇게 실력을 쌓아두면 유행과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가치를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다 운 좋게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져 유행이 찾아오면, 그동안 흘린 땀방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보람과 영광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자기학의 두꺼운 책장과 씨름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이용한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밤을 지새우는 젊은 인재들이 있다. 유행은 돌고 돌지만, 우직하게 쌓아 올린 기술의 깊이는 배신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는 그 길의 끝에, 시대를 이끄는 위대한 발견과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확신하며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
안승영 한국과학기술원 교수·한국전자파학회 상임이사 sahn@kaist.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