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칼럼] 보이지 않는 기술 경쟁력, 전자파 측정표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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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용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한국전자파학회 이사·CCEM GT-RF 워킹그룹 의장)

5월 20일은 150여년 전인 1875년 프랑스 파리에서 17개국이 서명한 '미터협약'을 기념하는 세계 측정의 날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대한민국 국가측정표준 대표기관으로서 올해 '측정표준:정책의 신뢰를 쌓는 초석'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측정단위와 측정표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길이, 질량, 시간 같은 단위는 산업과 과학기술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전기와 전자파는 에너지, 통신, 반도체, 국방, 우주 산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첨단 산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속도에 비해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해 왔다.

국제 측정표준 체계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인 국제도량형위원회(CIPM) 산하에는 국제도량형국(BIPM)이 운영되고 있으며, 물리량 측정의 국제적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내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는 CCEM은 현재 27개 회원국과 여러 워킹그룹을 통해 전기·자기·전자파 측정표준 체계를 이끌고 있으며, 전자파 분야는 CCEM GT-RF 워킹그룹이 담당하고 있다.

인류의 전자파 활용은 1900년 무렵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 성공을 계기로 본격화됐으며, 이후 세계대전과 라디오·TV 방송, 이동통신 산업의 발전을 거치며 전자파 기술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산업계가 특정 장비와 측정 결과를 국가간 경계 없이 신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난 100여년 동안 측정표준 기관들이 축적해 온 보이지 않는 노력과,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검증된 전자파 측정표준 체계가 있었다.

최근에는 차세대 통신, 양자컴퓨터,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전자파 측정표준 역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기존의 임피던스, 전자파 전력, 안테나 특성과 같은 전통적 측정량을 넘어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차세대 이동통신 후보 대역으로 거론되는 서브테라헤르츠(sub-THz) 대역은 매우 높은 주파수와 제한적인 출력 특성으로 인해 측정 자체가 쉽지 않다. 또 양자컴퓨터용 RF 소자는 극저온 환경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기존 상온 기반 측정체계로는 접근이 어렵다. AI 기반 전자파 시스템 역시 기존 측정 개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특성과 복잡성을 보여주고 있다.

측정표준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높은 정밀도를 구현하는 데 있지 않다. 각국의 측정 능력을 국제적으로 비교·검증하고 상호인정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산업·과학·통상의 신뢰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누구나 동일한 조건에서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측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1875년 미터협약 이후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 영역을 개척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마다 측정표준은 산업과 기술 발전을 뒤에서 조용히 지탱해 왔다. 특히 전자파 측정표준은 무선통신 기술의 진화와 함께 발전하며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기술 신뢰성을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초석 역할을 수행해 왔다.

국내 상황을 돌아보면 우려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전자파 계측장비 및 측정 산업 생태계는 여전히 취약한 측면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측정표준 기술을 국내 연구진이 개발하더라도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해외 선진국 장비업체의 계측장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국내 기술로 확보한 측정표준이 해외 장비의 신뢰성을 뒷받침하고, 우리는 그 장비를 다시 고가로 구매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중국은 지난 10여년간 대규모 투자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국 중심의 전자파 계측 생태계를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최근 국제학회에서는 중국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자국산 고성능 계측장비를 활용해 대규모 연구를 수행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국내 대학에서는 예산 문제로 구축이 어려운 고가의 측정장비가 중국에서는 비교적 폭넓게 보급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서 전자파 기술 수준 역시 빠르게 향상되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AI와 양자기술, 차세대 통신의 시대가 본격화되는 지금, 측정표준은 더 이상 표준기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측정표준은 산업 생태계의 언어를 정의하고 기술의 신뢰를 검증하는 국가 기술주권의 핵심 기반이다. 미래 산업 경쟁력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빨리 개발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고 국제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권재용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한국전자파학회 이사 jykwon@kris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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