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용차를 보내겠습니다.”
1993년 2월 26일 오전 9시 철통 보안 속에 문민정부 첫 조각이 발표되자 과학기술처에서 김시중 신임 장관에게 연락했다. 오랜 관행이었지만 김 장관은 이를 물리쳤다.
“과총 차량을 이용하면 되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과학기술처 직원들은 내가 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바랍니다.”
이날 오후 3시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김 장관은 곧바로 과학기술처로 출발했다.
과학기술처에 도착하니 박진호 차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김 장관을 맞이했다.
이때 장관 비서관이 다가와 말했다.
“연구소장 몇 분이 인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김 장관은 잘라 말했다.
“그분들을 돌려보내세요. 내가 나중에 직접 연구소를 방문할 때 인사를 나누겠다고 하세요.”
김 장관은 이어 오후 5시 취임식장인 과학기술처 대회의실로 갔다. 취임식에는 4급 이상 공무원들이 참석했다.
김 장관은 직접 작성한 취임사에서 앞으로 추진할 정책을 소상히 밝혔다.
“우리 경제의 회생은 과학기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현장과 접목이 잘 안 된다는 말이 많습니다. '과학기술이 자생력이 없어 경제가 약화했다'며 원인을 과학기술에 돌립니다.”
김 장관은 “과학기술 없이는 살 수 없다며 그 책임을 과학기술인에게 돌리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반드시 고쳐야 할 몇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저는 대학과 출연연구소, 기업연구소, 정부 등이 한자리에 모여 현재 방향을 다시 한번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대통령이 말씀하신 신한국 건설의 기반입니다.”
김 장관은 “첫째 과학기술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국가 발전을 위해 내가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서 “앞으로 정책을 추진할 때 나라의 몫을 주장하는 사람을 우대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김 장관은 “둘째 진실하고 묵묵히 나라 발전과 자기 개혁을 위해 밤늦게까지 대학과 연구소, 기업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라면서 “국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연구원들이 존경받고 우대받는 풍토를 하루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셋째 항상 창조와 능률을 앞세우며 일하는 행정가들이 과학기술계에 필요하다”면서 “전시 행정은 안 되며, '우선 할 일' '앞으로 해야 할 일' '문제점' 등 세 가지를 파악해서 대책을 세워 나가는 과학 행정을 펼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앞으로 선진 7개국 진입을 위한 선도기술개발사업(G7프로젝트)을 어떻게 추진할 것이며, 고급 과학기술 인력과 우수한 기능인 양성 등도 부처 간 협조를 통해 잘 추진해야 합니다. 국제협력도 중요합니다. 또 당면한 과제가 원자력 문제입니다. 원자력 폐기물 처리와 원자력 에너지 개발은 국민 합의를 얻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과학기술계는 우리만의 독자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김 장관은 “저는 일하러 왔다”면서 “과학기술계가 화합해서 국가 지상목표인 경제발전의 토대인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장관은 취임 후 1개월 동안 모든 일을 다시 배운다는 자세로 근무했다. 그는 주위 인사들로부터 장관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와 덕목에 대해 많은 조언을 들었다. 흔히 외부 발탁 장관의 경우 업무 파악에만 6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김 장관의 회고록 내용.
“모든 일을 새로 배운다는 자세로 여러 인사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공무원 세계는 학교와 판이했다.”(과학과 더불어 뜻을 키워 온 삶)
김 장관은 출근 시간을 오전 8시 20분으로 40분쯤 앞당겼다. 퇴근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6시 30분에 했다.
김 장관은 취임 후 출연연구소 간부들을 과학기술처로 불러 업무를 챙기지 말고 담당 공무원이 연구소로 가서 업무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출연연구소 간부 A씨의 말.
“산하기관 예산권을 쥐고 있는 과학기술처 담당자가 부르면 간부들이 즉시 달려갑니다. 그런데 김 장관 취임 후 과학기술처 담당자가 연구소로 와서 업무를 처리토록 했습니다. 연구원은 연구실에서 연구에 집중하라는 김 장관의 소신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김 장관은 당면 업무와 관련해 6가지 추진 계획을 수립했다.
첫째 대학이나 출연연구소, 민간연구소의 연구 환경 안정과 각 단위 사이에 벽을 허문다.
둘째 과학기술처가 국가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종합조정권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우리 취약 기술인 중간핵심기술(미디엄테코콜로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독자기술 개발로 제품의 부가가치를 끌어올린다.
넷째 정부출연연구소가 가지고 있는 특허 기술을 기업에 무상 양허,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
다섯째 기초연구를 활성화하고, 기초기술은 국제 수준으로 향상한다.
여섯째 원자력 사용 후 폐기물 지정 장소를 결정한다.
김 장관은 의욕에 넘쳤다.
2월 27일 오전 8시 40분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첫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문민정부 첫날부터 도도한 개혁이라는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김 대통령은 그동안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가안전기획부장과 감사원장에게 참석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경호실장도 국무회의에 입석하지 않도록 했다. 그동안 경호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부의 상징이었다. 문민정부의 달라진 모습이었다.
김 대통령의 회고.
“그동안은 대통령이 출근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경호실장이었다. 문민정부 들어서는 비서실장으로 바뀌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
김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사심을 버리고 자기 혁신과 자기 정화를 솔선해서 실천토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솔선해서 국민 앞에 서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 재산을 공개하겠습니다. 국무위원 여러분께서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소정의 절차를 끝내고 국민에게 양심에 따라 재신을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조했다.
일순 국무회의장은 대충격에 빠졌다. 일부 장관의 표정은 하얗게 변했다.
“전 재산을 공개하라니?”
김 대통령은 이날 서울 동작구 상도동 집, 고향 전답, 자동차, 헬스클럽 회원권 등 모두 6억8100여만원을 공개했다. 이전까지 어느 대통령도 스스로 전 재산을 공개한 일이 없었다.
주돈식 전 문화체육부 장관(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의 회고.
“김 대통령은 재산 공개는 위로부터 실행하는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점, 문민개혁의 출발이라는 점, 문민정부는 기존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 주겠다는 차별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공직자 재산 공개는 공직자의 '신분혁명'이라고 부를 만했다.”(문민정부 1200일 )
대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끝나자 김 대통령은 국무위원들과 오찬을 했다.
'점심은 맛있는 음식을 주겠지.' 이런 기대도 김 대통령의 한마디로 물거품이 됐다.
김 대통령은 식탁에 앉자 먼저 말을 꺼냈다.
“청와대에서 점심 먹자고 불러 대단한 줄 알고 오셨겠지만 메뉴는 칼국수입니다. 앞으로도 칼국수 아니면 설렁탕이니 다들 그렇게 아시오.”
김영삼 대통령이 회고록에 밝힌 내용.
“참석한 국무위원들은 메뉴가 칼국수라는 말에 또 한번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날 이후 칼국수는 청와대 오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내가 칼국수나 설렁탕을 청와대 오찬 메뉴로 한 것은 청와대가 검소한 식탁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김영삼 회고록 상)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조리장으로 일한 류한열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김영삼 정부)청와대 시절 보통 1주일에 세 번 이상, 하루에 많게는 100그릇 정도 분량의 칼국수를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청와대 칼국수는 문민정부 변화와 개혁의 상징이었다. 김영삼 정권 초반에는 청와대 칼국수 한번 먹어 보지 못한 정치인은 실세가 아닌 허세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개혁이라는 파도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