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77〉YS “인사가 만사”…과기처 장관에 김시중 박사

<177>문민정부 출범 첫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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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26일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준 뒤 청와대 본관현관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국가기록원 제공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 철학이었다. 문민정부 출범 첫 조각은 국민의 최대 관심사였다.

김 대통령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적재적소의 인사를 단행할 것인가.

1993년 2월 26일. 그 첫 번째 판도라의 뚜껑이 열렸다.

이경재 청와대 대변인(전 방송통신위원장)은 이날 오전 9시 청와대 춘추관에서 조각 명단을 발표했다. 이 내용은 전국에 TV로 중계했다.

“김 대통령은 오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이경식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에 한완상 서울대 교수를 임명하는 등 24개 부처 장관을 임명하셨습니다.”

이경재 청와대 대변인은 인선 원칙에 대해 “신한국 창조를 위해 착실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젊고 유능한 개혁 지향적인 인사를 고루 기용하려 노력했다”면서 “각계각층에서 기용한다는 기준에 따라 젊은 층에서 과감하게 발탁했고 여성도 배려했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김 대통령은 25일 밤늦게까지 자료를 직접 챙기며 마지막까지 입각 여부를 고심했다”면서 “ 청와대에서 25일 오후 2시에 김 대통령이 황 총리와 만나 1시간 50분가량 인선 문제를 협의했고 몇몇 인사들에 대해서는 밤늦도록 김 대통령이 직접 발탁 여부를 챙겼다”고 부연 설명했다.

이 대변인이 발표한 문민정부 첫 내각 명단은 아래와 같다.

△외무 한승주 고려대 교수 △내무 이해구 민자당 의원 △재무 홍재형 외환은행장 △법무 박희태 민자당 대변인 △국방 권영해 국방차관 △교육 오병문 전 전남대 총장 △문화체육 이민섭 민자당 의원 △농림수산 허신행 농촌경제연구원장 △상공자원 김철수 무역진흥공사 사장 △건설 허재영 국토개발연구원장 △보사 박양실 한국여의사회장 △노동 이인제 민자당 의원 △교통 이계익 전 관광공사 사장 △체신 윤동윤 체신차관 △총무처 최창윤 민자당 총재비서실장 △과기처 김시중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직무대행 △환경처 황산성 변호사 △공보처 오인환 민자당 총재정치특보 △정무1 김덕룡 민자당 의원 △정무2 권영자 여성개발원장 △법제처장 황길수 전 법무부 법무실장 △보훈처장 이병태 주 호놀룰루 총영사.

이날 임명한 각료를 직업별로 보면 △현역 의원 5명 △교수 5명 △여성 3명 △변호사 2명 △공직자 5명 △군 2명 등이었다.

이 대변인이 밝힌 당시 상황.

“황인성 총리가 내각 구성에 관한 논의를 하고 돌아가자 대통령이 오후 3시 반쯤 박관용 비서실장과 나를 불렀다. 대통령은 양복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냈다. 조각 명단과 이력서 등이었다. 대통령은 서류를 건네면서 다음날 (26일) 오전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과학기술처 장관에는 전·현직 고위 관료와 교수, 연구기관장 등이 하마평에 올랐지만 김 대통령은 김시중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직무대행을 최종 낙점했다..

신임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은 1932년 충남 논산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고려대 대학원에서 무기화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55년부터 고려대에서 후학을 양성해 왔다. 우리나라 무기화학 분야 기반을 다진 학자로 행정력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려대 이과대학장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직무대행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김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다. 다만 김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인 1993년 2월 13일 민자당 당사 회의실에서 과학기술계의 총의를 모은 '신한국 창조를 위한 과학기술진흥종합 건의서'를 직접 전달하고 과기부총리제 도입을 적극 건의한 일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남달랐다. 자신이 직접 상대를 만나 면접을 보고 발탁했고 인사발표까지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인사를 할 때 나는 발표 전까지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런 인사 스타일을 두고 '깜짝쇼'라며 매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으로서 인사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고위직에 등용할 것이라고 하면 그를 시샘하는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여론재판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김영상 대통령 회고록1)

김 대통령은 인사를 할 때 상대에게 “인사 내용이 사전에 알려지면 취소하겠다”거나 “아내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보안 유지를 특별히 당부했다.

실제 김 대통령은 인사 내용이 언론에 사전 유출하면 인사를 백지화했다. 이런 일이 알려지자 입각 내정자들은 자기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만에 하나 인사 내용이 새나가면 입각은 물 건너갔다.

김시중 장관의 생전 증언.

“조각을 앞두고 언론에서 여러 사람의 입각 하마평이 나돌았습니다. 나는 입각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2월 어느 날. 뜻밖에 당선자 측에서 전화가 왔다. “당선자가 만나자”면서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했다. 당선자 측에서 2월 18일 약속 장소로 혼자 오라고 했다.

약속 장소에 갔더니 김 당선자가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김 회장, 요즘 어떻습니까.”

“교육과 연구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하던 김 당선자가 주변에 사람이 없자 본론을 말했다.

“과학기술처를 맡아 함께 신한국 창조를 위해 일합시다. 이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김 회장은 “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당선자는 다음 일정이 있다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문제는 보안 유지였다. 김 대통령은 조각 발표 때까지 보안을 유지하라고 특별히 당부였다.

김 회장은 2월 24일 열리는 차기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상태였다.

후보를 어떤 명분으로 무리 없이 사퇴하느냐가 당장 발등의 불이었다.

김 전 장관의 회고.

“고심 끝에 원로들과 상의키로 하고 2월 22일 민관식 명예회장을 집으로 찾아가 '몸도 피곤하고 오직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회장 입후보를 사퇴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문교부 장관과 국회부희장 등을 역임한 민 명예회장은 금세 눈치를 채고 '입각 제안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안을 마련해야 지요' 하면서 선 듯 양해를 해 주셨습니다.”

2월 23일 밤늦게까지 학교 교수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중으로 이력서와 사진을 가지고 청와대로 오시기를 바랍니다.”

김 회장은 서둘러 이력서 등을 서둘러 준비해 자동차를 운전해 청와대로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보안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을 보낼 수가 없었다.

대학교 안에서 보안을 지키는 일도 어려웠다.

고려대 김희진 당시 총장은 문민정부 출범 일주일 전부터 김 회장에게 “입각 소문이 있는데 김 교수가 아닌가요. 솔직하게 말하세요”라고 물었다.

대통령과 보안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며 상황을 모면하곤 했다. 김 총장은 “발표전에는 내게 사실을 꼭 알려 주세요”라고 했다.

조각 발표날인 26일 오전 7시 30분. 김 회장은 김 총장에게 전화로 입각 사실을 말했다.

김 대통령은 26일 오후 3시 20분 청와대에서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김 대통령은 의전 절차에 얽매이지 않고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열심히 하십시오.”“할 일이 많습니다”라며 격려했다.

임명장 내용은 간단했다. “임명장 김시중. 국무위원에 임함. 과학기술처 장관에 보함. 1993년 2월 26일. 대통령 김영삼”

김 대통령은 이어 각료들과 일일이 기념촬영을 하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임명장을 준 뒤 김 대통령은 본관 앞 현관 계단에서 다시 기념촬영을 했다.

문민정부의 첫 조각 발표는 국민에게 호평받았다. 젊은 여성 각료들을 많이 발탁했고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에 김덕 교수를 선임한 것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국민이 깜짝 놀랄 청와대발 개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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