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강대국 간의 전략적 경쟁과 지정학적 긴장은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 지원할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미국, 중국, 일본, 인도 등 주요 경제국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전략산업에서 자국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산업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자국 기업 육성 정책에는 생산 및 판매 보조금, 세제 혜택, 연구개발(R&D) 투자 지원 등이 포함되며, 해외 경쟁업체에서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관세 부과, 수출 인센티브 제공, 외국인직접투자(FDI) 규제 등 통상 정책이 병행되기도 한다.
유럽연합(EU) 역시 이러한 흐름에 앞장서서 참여하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1기 집행위원회에서는 '유럽반도체법' '기후중립산업법' '핵심원자재법' 등 첨단 전략기술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기조는 지난해 말 출범한 폰데어라이엔 2기 집행위원회 정책에도 더 강력해진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초 '경쟁력 강화 5개년 계획(2025~2029)'을 발표해 반도체, AI, 친환경 기술, 바이오, 방위 분야에서 기술혁신 및 역외 의존도 축소를 추진하고 있으며, 관련해 '청정산업계획' 'AI투자이니셔티브' '핵심의약품법' 등을 연달아 제시하며 핵심 산업 지원을 구체화했다. 한편 EU는 해외 전기차, 태양광 패널, 철강 제품 등에 대한 환경 및 노동 기준 실사, 반보조금 조사 및 반덤핑 관세 부과를 확대함으로써 경쟁업체로부터 국내 기업을 보호하고자 했다.
EU를 비롯한 주요국에서 자국 우선의 보호주의로 정책을 선회함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에도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수행한 'EU의 기후중립 전략기술 육성 정책이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주는 함의' 보고서는 계량경제 방법론을 통해 EU가 시행한 산업·통상 정책이 수출입 공급망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특히 보고서는 재생에너지, 배터리, 수소, 탄소포집 등 EU가 지정한 “기후중립 전략기술”에 집중했다. 이 기술과 연관된 499개 품목을 정해 분석한 결과, 보조금, 수출입 통제, 무역구제 조치, 정부조달 관련 규제 등의 정책은 EU 회원국 간 역내 무역을 촉진하고 비회원국과의 역외 무역은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효과는 정보통신기술(ICT) 산업과 전략산업에서 두드러졌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우리나라 기업의 생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EU의 정책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EU의 정책이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이 요구된다.
첫째, 범정부 차원의 협력 체계를 구축해 공급망 변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산업 정책과 통상 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국내 기업들의 생산 및 기술개발 역량 강화,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셋째, 첨단 산업 분야의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정부와 기업, 연구기관 간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넷째, EU와의 협력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FTA를 비롯한 양자·다자 협력 채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호라이즌 유럽을 활용한 양자간 연구 교류 역시 관심이 필요하다.
EU의 기후중립 전략기술 육성 정책은 단순한 산업 정책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선제적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정부와 기업, 연구기관 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연구위원 yojang@kiep.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