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의 호소]탄소중립발 산업 재편에 속수무책 중소기업

기업별 탄소배출량 가늠하기도 어려운데
정부 막무가내식 정책에 끌려가는 중기
실태파악 안돼 지원책 효과도 미지수
산업별 면밀한 검토·실천방안 찾아야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중소기업(300인 미만) 탄소 배출량

“당장 우리 공장에서 얼마나 탄소가 배출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무슨 탄소중립입니까. 원료나 소재를 공급자인 대기업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 전환을 위한 비용이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플라스틱 제조업체 A사 대표는 지난해 말부터 쏟아진 정부의 각종 탄소중립 관련 대책에 대한 답답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부터 탄소중립을 위한 한국형 순환경제 이행계획까지 각종 관련 대책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렇다 할 경영 계획을 수립할 수 없어서다. 당장 내년부터 재생원료 사용 의무가 부과된다지만 현 공정 가운데 어느 정도를 전환해야 할지, 원료 대체에 따른 생산 비용은 얼마가 늘어날지 여부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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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 열풍에 끌려가는 中企

전 세계적인 탄소중립 전환 논의 확산은 중소기업에 또 다른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개별 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정책 변화에 따른 친환경 전환 요구는 점차 빨라지고 있어서다. 대기업들은 기업가치 증대를 위해 저마다 탄소중립에 대응하고 있지만, 정작 중소기업들은 실태 파악도 없이 공급망 재편에 따른 변화에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중소 플라스틱업계는 탄소중립 정책에서 소외된 대표 업종이다. 플라스틱은 대기업인 석유화학기업으로부터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염화비닐(PVC)와 같은 합성수지 원료를 구매해 중소업체가 생산한다. 업계 70% 이상이 대기업으로부터 원료를 납품받아 부품이나 완제품을 만든다.

석유화학산업은 철강, 시멘트와 함께 온실가스 배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업종으로 꼽힌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NDC를 상향하는 과정에서 석유화학산업의 원료를 납사에서 바이오납사로 전환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감축목표를 산정했다.

원료 공급자인 석유화학업체 원료 전환이 플라스틱 생산 공정 전반에 직접 영향을 주는 구조이지만 논의 과정에서 중소기업계의 의견은 배제됐다.

생활폐기물 탈플라스틱 대책에도 중소기업계 의견은 담기지 않았다. 2030년까지 플라스틱 재활용을 확대해 재생원료 사용 비율을 30%까지 확대하겠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정작 중소기업계에 대한 지원 방안은 물론 의견 수렴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실태파악 없이 번지수 잘못 찾는 지원책

플라스틱 업종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고탄소 배출 중소기업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금속가공, 식음료, 기타기계 등 나머지 업종은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대응에 손 놓은 상황이다.

한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산업별로 공정 전환부터 저탄소 연료 전환 등 저마다 다른 해법이 필요한 상황에서 뚜렷한 가이드라인 없이 일단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라니 대응책이 없다”면서 “결국 요구받은 온실가스 감축률만큼 생산량을 줄이는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앞서 감축목표를 산정하는 과정에서도 중소기업이 전체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은 이뤄지지 못했다. 산업부와 에너지공단이 도출한 통계에서 300인 미만 중소기업을 추려내 추정한 것이 최선이었다.

1개 기업당 평균 배출량이 극히 미미할 뿐 아니라 배출량 상위업종에 포함되는 중소기업 수도 약 6만7000여개에 이르다 보니 개별 중소기업의 현황 파악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중소기업계가 지나치게 탄소중립 속도가 빨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주된 이유다.

실태 파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니 정부가 제시한 지원책 역시 '번지수'를 잘못 찾고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탄소중립이 화두가 된 이후 지난해 안팎으로 중기부 산하 공공기관이 저마다 탈탄소 전환을 내걸고 융자와 보증 등 각종 사업을 신설하고 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서도 올해 예산에 반영된 중기부의 '중소기업 탄소중립 전환지원 사업'이 면밀한 수요예측 없이 이뤄져 효과 파악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공공기관마다 탄소중립 인증이니 컨설팅이니 하면서 융자를 지원해준다고 하지만 정작 얼마나 효과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절반을 지원한다고 해서 선뜻 투자할 기업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계 안팎에서는 이처럼 정부가 중소기업 탄소중립 지원 대책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이유로 산업에 대한 전문성 부족을 꼽고 있다. 그간 중소기업 지원 대부분이 판로개척이나 정보화 사업처럼 개별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방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산업별 특성에 맞는 검토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실제 탄소중립 전환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중소기업중앙회 산하 각 협동조합에서는 저마다 산업계 요구사항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중소기업계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마땅한 정부 내 대응 체계는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한 중소기업협동조합 관계자는 “탄소중립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 사항을 가져오라고 하면 플라스틱부터 광산, 전선, 유리까지 저마다 각기 다른 요구를 공무원 두어명에게 길어야 5~10분 건의하고 나오는 상황에서 무슨 면밀한 검토가 이뤄지겠느냐”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제는 중소기업의 탄소중립은 실천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면서 “산하 공공기관 등을 적극 활용해 중소기업의 탄소중립을 실질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및 대기업 고탄소업종 탄소배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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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 및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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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소기업 탄소중립 인식 및 대응조사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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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윤건일 벤처바이오부장(팀장), benyun@etnews.com 권건호·유근일·조재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