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건. 어느 백과사전은 광고에 사용된 짧고 인상 깊거나 기억에 남는 문구라고 정의한다. 스코트-아일랜드 어원의 슬러그하임(sluagh-ghairm)에서 왔다. 슬러그(slugh)는 군대, 가임(gairm)은 크게 외치는 소리란 의미다. 그러니 반복 사용되는 광고 문구를 뜻하기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혁신에 왕도가 있을까. 이 질문을 받고 그런 건 없다고 즉답했다. 그 대신 한마디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당신만의 왕도는 있을지 모른다고.

혹 사례가 있냐는 질문에 '구호'란 건 어떠냐고 되물어 본다. 언뜻 보기에 '말장난'인 이것으로 기업이 바뀔 수 있을까. 지속 혁신이 가능할까. 실상 내 아카이브엔 그런 사례가 있다.

샤프는 하야카와 도쿠지가 창업한 하야카와전기공업에서 시작됐다. 1915년 샤프 펜슬로 대성공을 거둔다. 실상 0.5㎜ 샤프를 처음 개발한 곳이 여기다. 물론 샤프란 사명도 여기서 왔다.

1953년엔 일본 최초로 TV를 제작한다. 1964년엔 최초의 트랜지스터 계산기, 1966년엔 집적회로(IC) 계산기를 각각 내놓는다. 턴테이블이 달린 전자레인지를 처음 내놓은 곳도 여기다. 1969년엔 최초의 포켓 계산기를 내놓는다. 가격은 300달러, 샤프를 혁신기업 반열에 들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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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엔 사명을 샤프로 바꾼다. 이 새 사명에 어울리는 사업은 뭘까. 그것도 지속 성장을 약속하는. 1973년 샤프는 옵토일렉트로닉스(광전자)라는 신조어를 내놓는다. 빛(광)을 뜻하는 옵토(opto)를 전자공학을 뜻하는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 앞에 붙였다.

샤프는 이 '광전자 공학'이란 단어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미래 이미지라고 했다. 자신의 비즈니스 지향점이라고 했다. 그러자 자신이 어떤 기업이 돼야 하는지 분명해졌다. 성장 전략을 감싸는 루브릭이자 표제어가 된다.

샤프는 최초의 액정표시장치(LCD) 계산기를 내놓는다. 샤프는 계산기를 넘어서기로 한다. 곧 LCD 기술과 반도체 기술이 결합된 광범위한 제품에서 시장 선두 주자가 된다. 포터블 TV, 포켓 노트북, LCD 프로젝션 시스템에서 LCD가 앙증맞은 미니디스크 플레이어까지.

훗날 이것은 샤프 성공의 '개념 우산'이 됐다고 일컬어진다. 겉보기에 의미 없는 추상 용어로 보이지만 수없이 이질일 수밖에 없는 기업 활동과 사업, 전략을 일관되게 연결하고 관통하는 개념이란 의미였다.

이런 사례는 실상 여럿이다. 혼다 개발팀장이던 와타나베 히로의 표현을 빌리면 혼다 패밀리카의 디자인 혁신은 '혼다 자동차 혁신론'이라는 슬로건으로 공유되고 반복될 수 있었다. 캐논은 '관리 편의성'이라는 개념이 정립됐을 때 비로소 미니 복사기의 개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팀 회식 자리에서 맥주 캔을 들여다보며 던진 “드럼을 이런 식으로 만들면 얼마나 들까”란 질문도 이것 없이 떠올릴 일 없었다. 이 질문은 '일회용 복사 드럼'으로 실현됐고, 진정한 의미의 개인용 복사기가 이렇게 태어났다.

혁신에 왕도는 있을까. 여전히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나 나만의 왕도는 있다. 누군가는 단어 하나로 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찾았다. 그러고 보면 융중의 초당을 찾아온 유비를 앞에 두고 내놓은 비책 역시 '세 개의 솥발'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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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