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연 대개혁] <1>노는 연구원, 노는 연구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큰길에 자리 잡은 연구기관 연구동은 밤새 불을 환하게 켜 놓는다.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마저도 꺼 놓으면 정부 출연 연구기관 전체가 적막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죽어 있다느니 존재감이 없다느니 하는 소리는 듣기 싫은 것이다.

연구원이 칼 출근, 칼 퇴근 하는 것은 당연시되는 문화다. 미래창조과학부 한 공무원은 “업무 때문에 퇴근시간을 잠시 넘겨 전화를 걸면 아무도 받지 않아 답답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ETRI 한 전임 원장은 한때 오전 9시 이후 출근하는 연구원들을 정문에서 잡아 기록하기도 했다. 기관장이 근태 관리를 할 만큼 나태했다. 일부에선 오죽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느냐는 소리도 나왔다.

오후 6시가 되면 대덕연구단지 네거리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칼 퇴근하는 연구소 차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빚어지는 교통 정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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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 없이 시간만 때우는 연구자도 많다.

A 연구원은 출근했지만 딱히 할 일도 없다. 우선 커피 한잔 마시고 책상에 앉았다. 주어진 일은 중소기업 지원 업무다. 어제 일을 대충 마무리했기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월차 휴가 계획을 세웠다. 이 연구원의 연봉은 1억1000만원이다. 자녀들이 서울로 올라가 조만간 서울 사무소로 지원, 두 집 살림을 꾸릴 계획이다. 박사급 연구원이지만 하는 일은 대학을 갓 졸업한 인력이 하거나 고교 졸업자가 해도 되는 행사 준비 보조 업무다.

다른 출연연 기관의 B연구원은 기관으로부터 네 차례나 나가라는 경고도 받았지만 버티고 있다. 기관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평가에 따라 왕따 수준으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중소기업 지원 업무를 맡아 10년째 딴 짓만 하고 있다. 특정 업체를 봐주며 자신의 뒷일을 도모하고 있지만 이 사실을 어느 누구도 모른다.

B 박사는 “내가 얘기해도 끼워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당장 나갈 수는 없으니 버티는 데까지 조용히 버티고 있다. 날 내쫓아 낼 사람은 없다. 기술이전료만 좀 덜 챙길 뿐 월급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면서 “40대지만 남보다 더 먼저 노후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다”고 고백했다.

노는 연구자가 만연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거치면서 박사급 인력은 살아남고 그 밑에 있는 인력, 예를 들어 고교 졸업자나 기능직·임시직 등 힘없는 사람들만 정리됐기 때문이다. 출연 기관에 직무 대비 학력 인플레가 어느 조직보다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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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범 과학기술 전문기자 hbpar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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