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판을 내준 이세돌 9단은 힘이 빠졌다. 승리를 거둔 알파고는 표정이 없다. 대결의 장을 마련한 구글은 뒤에서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9일 인간계 최고수와 최강 인공지능이 벌인 세기의 대결. 인공지능에 맞서 바둑이라는 보루를 지키려는 이 9단과 바둑 챔피언에 도전하는 영광을 이룬 알파고에 시선이 집중됐다. 한 쪽이 바둑알을 놓을 때마다 감탄과 탄식이 이어졌다.
진짜 주인공은 구글이었다. 지난해 판후이와의 대국을 완승으로 장식한 후 치밀하게 준비한 이세돌 대국 시나리오는 9일 첫판과 함께 절정으로 치달았다. 대국 생중계 사이트에는 접속이 이어졌다. 세계 언론과 바둑팬, 나아가 일반인까지 구글이라는 기업이 지닌 가능성과 창의성에 주목했다. 구글은 알파고-이세돌 대국으로 추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기업 홍보 효과를 누렸다.
종전까지 정보기술(IT) 업계의 인공지능 리더는 IBM이었다. IBM은 독자 개발한 인공지능으로 인간 체스 챔피언과 퀴즈왕을 꺾었다. IBM은 인공지능이 지닌 한계를 하나씩 허물었다. 이후 수많은 소프트웨어(SW)·하드웨어(HW) 기업이 인공지능 분야에서 한걸음씩 나아갔지만 IT업계에서 인공지능 하면 떠오르는 기업은 IBM이었다.
구글은 알파고로 단숨에 IBM을 추격했다. 알파고는 이 9단과 대국을 계기로 인공지능에서 IBM ‘왓슨’ ‘딥블루’를 잇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올라섰다. 당초 이 9단에게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높게 평가됐지만 예상 밖에 첫 승을 거두며 파란을 일으켰다.
구글은 ‘세기의 대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수차례 사전 기자간담회로 분위기를 띄웠다. 9일을 시작으로 15일 마지막 5회 대국까지 매 경기가 끝날 때마다 이 9단이 참석하는 기자간담회를 갖는다. 에릭 슈미트 회장이 직접 한국을 찾아 대국을 관전했다. 정작 구글 한국지사에는 이렇다 할 인공지능 연구 조직 하나 없지만 한국의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모양새를 마련했다.
국내 IT업계 관계자는 “구글은 지금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분야에도 과감히 투자하는 등 선도기업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우리 IT기업이 벤치마킹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요란한 시작에 비해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구글 글래스’로 웨어러블 컴퓨팅에서 앞서 나가는 구글식 도전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호준 SW/콘텐츠 전문기자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