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은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불안’ 요인 중 하나다. 당장 앞날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 모습은 이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40·50대 직장인은 고용불안에, 퇴직자는 노후불안에 시달린다. 자영업자는 IMF에 버금가는 한파를 맞았다. 원금 상환 불안은 소비증진에 발목을 잡는다. 가계부채 1000조원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한국인 단면이다. 중장기적으로 주택담보대출 원금 상환이 도래하는 2019년까지 불안심리 해소를 기대하기 어렵다. 여유 있는 계층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내유보금 500조원 시대를 맞이한 10대 대기업은 주판알만 굴린다. 사정한파에 시범 케이스로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약발이 안 먹힌다.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돈을 풀지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다. 한국형 양적완화 모델인 초이노믹스에 의한 경기부양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구조적 요인이 자리한다. 다름 아닌 ‘핵우산’ 시스템이다. 핵폭발 시 지층 산소가 한꺼번에 하늘로 올라가듯이, 중산층과 서민에게서 거둬들인 돈은 우리 사회 지배층 곳간에 차곡차곡 쌓인다. 우리 경제 하부 뿌리는 갈증을 호소하지만, 단비는 윗부분만 적신다. 삼투압 방식으로 거둬들인 돈은 이른바 권력과 자본력 보유 층에 유입된다. 갈증에 목이 마른 하부 뿌리는 당연히 자생력을 잃어간다.
국민은 점점 가난해지는데, 국가 곳간에는 돈이 넘친다. 공기업과 공공기관은 세금을 펑펑 쓴다. 이른바 ‘구름 머니’로 불리는 정책자금은 특정인들의 쌈짓돈처럼 입금된다. 쓰지도 않을 돈이 편성되는 경우도 되풀이된다. 2013∼2014년도 2년간 예산 불용액은 35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안 써도 됐을 돈을 애초 예산에 편성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공기업과 지방공기업의 천문학적인 부채 역시 유리지갑에서 빠져나갔다.
이쯤 되면 양적완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사상의학처럼 나라별로 경제체질이 다를 수 있다. 태음인에게 소양인 처방을 내려선 효험이 생기겠는가. 미국과 우리나라는 차이가 있다. 양적완화를 통해 제2 전성기를 맞이한 미국은 지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집값 걱정은 상당 부분 해소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가장이 보유한 집 소유권이 사실상 은행이다.
우리에 맞는 처방전은 뭘까. 체질개선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핵우산 시스템 변경을 위한 조처가 병행돼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핵우산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 필수 생활비용을 낮춰주고, 직간접세 및 준조세를 줄여줘야 한다. 감세가 답이다.
정부 가계부 조정도 필요하다. 연간 30조원 이상 웃도는 불용 예산과 지자체 및 공기업의 방만 경영만 바로잡아야 한다. 허투루 사용되는 3000억원이 넘는 국고보조금에 대한 대대적 개혁도 필요하다. 예산과 세출구조에 대한 대수술은 더 이상 늦춰선 안 된다.
“이제 먹고사는 일은 경제의 손을 떠났다.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멘큐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의 말이다. 핵우산 구조변경은 한국형 양적완화가 성공하는 전제조건이다.
김원석 글로벌뉴스부 부장 stone2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