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산업육성 구호만 맴도는 한국 시스템반도체

지난 1997년 7월 통상산업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산학연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반도체산업 민간협의회’를 개최했다.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구조로 인해 부침이 심한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것으로 메모리·비메모리 간 균형 발전을 꾀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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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임창열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은 “메모리 위주로 되어있는 산업 구조를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균형 있게 생산하는 선진국형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세계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28%였지만 비메모리는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6%에 불과했다. 이후 정부는 이듬해 ‘시스템 집적 반도체 기반 기술 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비메모리의 핵심인 시스템반도체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1997년 당시 정부는 2005년께 우리 비메모리 산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러있다. 숱한 산업육성 정책이 수립·시행되고, 또 다시 마련됐지만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에 봄날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20년째 요란한 산업육성 구호만 반복됐다.

지난 봄 국내 반도체 업계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사상 처음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2위를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생산액 점유율은 16.2%로 종전 2위였던 일본(13.7%)을 넘어섰다. 지난 1996년 메모리 시장에서 세계 2위를 달성한 지 17년 만에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도 2위 자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속 모습을 들여다보면 마냥 박수칠 일은 아니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메모리반도체 점유율은 52%로 압도적인 1위였지만 비메모리에 해당하는 시스템반도체 점유율은 6%에도 못 미쳤다.

시스템반도체는 데이터를 처리하는데 초점을 맞춘 반도체로 데이터 저장에 국한된 메모리와 달리 전자기기에서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구동에 필요한 중앙처리장치(CPU)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비롯해 스마트폰 카메라용 이미지센서, 차량용 감응센서, 전력반도체 등 셀 수 없이 많은 제품이 포함된다.

시스템반도체는 다양한 종류만큼 시장도 크다. 시장조사 업체 IHS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시스템반도체 생산액은 1965억2900만달러로 전체 반도체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메모리반도체 생산액 654억5900만달러의 3배에 달한다.

CPU와 AP를 제외하면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여서 중소기업도 다양한 제품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매력 요인이다. 대규모 설비 투자 중심의 메모리 산업과 달리 반도체 공장이 없는 팹리스 형태로도 얼마든지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는 게 시스템반도체 시장이다. 일단 특화된 영역을 확보하면 부가가치를 높여 고수익을 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우리 정부는 오래 전부터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지난 1998년 옛 산업자원부와 과학기술부는 ‘시스템 집적 반도체 기반 기술 개발사업(시스템반도체 2010사업)’에 착수했다. 이후 △비메모리산업 혁신을 위한 반도체설계 경쟁력 제고 방안 △시스템반도체산업 상생 협력 사업 △아날로그반도체 산업 육성 방안 △시스템반도체 산업 기반 조성 사업 △시스템반도체 및 장비산업 육성 전략 등을 시행했다. 지난해에는 ‘반도체 산업 재도약 전략’을 수립하면서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을 꼽고, 오는 2025년 세계 2위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처럼 ‘시스템반도체’라는 키워드로 수많은 지원 사업과 정책이 시행됐지만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8%로 오히려 전년 대비 0.3%P 낮아졌다.

국내 반도체 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조차도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는 초라한 모습이다.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는 전체 반도체 사업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다. SK하이닉스는 시스템반도체 매출 비중이 3~4%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너무 낮다.

중소기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과거 몇몇 기업이 대기업에 대량 납품하며 급성장하기도 했지만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단일 기업 매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시장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은 뒷걸음질 쳤다.

최근에는 경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최대 전방 산업인 스마트폰 시장까지 주춤하면서 또 한 번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영업이익 상위 10대 팹리스의 1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10곳 모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감소세를 기록했다. 시장 흐름에 따라 부침이 심한 국내 중소 시스템반도체 업계의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20년 가까이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지금도 산업육성 구호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맴도는 것이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현 주소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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