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연잎을 본 적이 있다면 신기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넓은 표면을 가진 연잎 위에 물방울이 닿아도 잎이 젖지 않고 방울져 떨어진다. 연잎 표면은 비닐처럼 액체가 통과되지 않는다. 여기서 착안해 물과 기름에 젖지 않는 신소재가 탄생했다. 먼지나 더러운 물질이 표면에 묻었을 때 흘러 떨어지는 `로터스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연잎뿐만이 아니다. 듀퐁에서 개발한 나일론은 1935년 누에고치 실로 짠 비단을 모방한 섬유다. 1948년에는 엉겅퀴 씨앗이 옷감에 달라붙는 형상을 보고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벨크로 테이프(찍찍이)`를 만들었다. 인류 문명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연 환경. 그 속에서 물리·화학 등 원리를 찾아내 실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과학이다. 자연을 따라한 과학, 바로 자연모사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 자연모사 기술은 자연 생태계와 자연 현상, 살아있는 생명체의 기본 구조와 원리 등에서 영감을 얻어 공학적으로 응용하는 기술을 말한다. 생태모방, 생체모방공학, 바이오닉스, 바이오그노시스 등 용어와 동일한 의미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자연 모사 기술을 이용해 상품을 만든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 신칸센 고속전철은 초기 디자인한 앞부분은 둥근 모양이었다. 터널을 빠져 나갈 때 공기 압력이 바뀌어 소닉붐(음속폭음)이 생기는 문제가 나타났다. JR웨스트는 물총새가 공기 중에서 물속으로 서로 다른 밀도의 매질 사이를 이동하는 데 물방울이 잘 튀지 않는 점을 주목했다. 물총새 부리 모양형태로 고속 전철 앞부분 디자인을 변경해 소음을 대폭 줄였다. 기존보다 15% 적은 전기로 10%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됐다.
영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수영복 제조업체 스피도는 갈라파고스 상어 피부에 나타나는 현상을 활용해 물 저항을 5% 감소시킨 수영복을 출시했다. 갈라파고스 상어 피부 돌기는 패턴구조가 세균이 피부에 내려앉아 달라붙은 것을 방해한다. 수영복 외에도 세균 부착 방지 필름이나 오염 방지 페인트가 탄생했다.
흑등고래는 가리비 모양의 테가 둘러진 물갈퀴 돌기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물속에서 32% 더 적은 저항을 받고 움직일 수 있는 것에서 착안해 웨일파워사는 고효율 풍력 발전기(팬 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연모사 기술 개발이 활발하다. 임현의 한국기계연구원 나노자연모사 연구실 박사팀은 이달 초 광대역 파장에서 화학적 코팅 없이 빛을 잘 반사 하지 않는 나노구조물을 만들었다. 기존 디스플레이는 빛 반사를 막기 위해 여러 겹의 화학 코팅 방식을 사용했다. 임 박사팀이 개발한 나노 구조물은 층층이 코팅할 필요가 없어 비용이 절감된다. 표면에 나노구조물을 고르게 바를 수 있어 어느 각도에서도 반사 방지 성능이 동일하다.
임 박사팀은 어떤 자연현상에서 이 기술 원리를 찾아냈을까. 주인공은 나방이다. 나방은 주로 밤에 활동하는데 나방눈은 자기 방어를 위해 빛이 나지 않도록 반사 방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임 박사는 “반사 방지 표면을 만드는 것은 현재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태양전지 업계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숙제”라며 “이번에 개발한 기술은 국산화가 가능하도록 관련 업계에서 성능 최적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임 박사는 물을 잘 모을 수 있는 사막 딱정벌레 등껍질 패턴, 거미줄 등을 활용한 물 공급 기술 연구에도 매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소금쟁이를 모사한 기술이 태어났다. 김택수 KAIST 기계공학과 교수와 현승민 기계연구원 나노역학연구실 박사 공동연구팀은 물 표면 특성을 이용해 나노 박막의 기계적 성질을 평가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소금쟁이가 물 표면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것에 착안한 연구팀은 표면 장력이 크고 낮은 점성을 가진 물 특성을 이용해 약 55나노미터(㎚) 금나노박막을 띄웠다. 손상 없이 기계적 성질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나노박막의 기계적 성질 평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의 신뢰성을 예측하는데 중요하다. 김택수 교수는 “앞으로 기존 강도 시험법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했던 그래핀 등 2차원 나노박막의 기계적 성질을 밝혀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