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맘대로 얘기하세요, 100자 이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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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 이하 글에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지난 8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과 함께 제한적 본인 확인제, 이른바 인터넷 실명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인터넷 실명제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좀비처럼 국내 인터넷 공간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포털 다음에 운영하는 게시판 서비스 `아고라`에 실명 인증 시스템을 붙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선관위는 다음에 과태료 500만원을 부과하고, 보완 조치가 이뤄질 때까지 매일 50만원씩 과태료를 추가할 방침이다.

인터넷 실명제 없어진 것 아니었나. 지난 8월 헌재는 일평균 10만명 이상 방문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글이나 댓글을 달 때엔 실명을 확인하도록 한 정보통신망법의 제한적 본인 확인제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선거 기간 중 인터넷 뉴스 사이트 등에 글을 남길 때엔 실명을 확인하도록 한 공직선거법의 인터넷 실명제는 아직 살아 있다. 헌재 결정의 효력은 심판대상 조문에 한정되므로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 확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 선관위의 생각이다.

선관위는 헌재 판결 취지를 존중해 공직선거법의 인터넷 실명제 조항 폐지를 건의했으나 대선 정국에 묻힌 국회에서 개정안은 햇빛을 보지 못한다. 정해진 법은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소셜 댓글은 실명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해명이다.

불합리한 법 체계와 지체된 개정 절차 사이에서 고민하는 선관위의 애환이 느껴진다. 그러나 인터넷 사용자나 인터넷 기업으로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댓글은 실명 인증을 안 해도 되고 게시판은 실명 인증을 해야 한다면 납득할 사람이 있을까. 게시판 글과 댓글을 분리해 받아들이는 네티즌은 없다.

그러니 “100자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리라는 거냐”는 얘기가 나온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은 헌재 판결 이후 실명 인증 시스템을 걷어냈다가 부랴부랴 다시 붙이느라 쩔쩔맨다. 선관위 스스로 “공직선거법 실명제 조항 폐지 작업을 하겠다”고 밝힌 터라,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스스로 버렸다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다. 건전한 선거 문화를 만드는 사회 역량을 키워나가는 계기로 삼자고 위로할 수도 있겠으나, 처음 잘못 끼운 규제 정책의 여파는 생각보다 길다.


한세희 콘텐츠산업부 hah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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