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에만 집중된 구조.
한국 반도체 산업 특징을 논할 때 반드시 나오는 말이다. D램과 낸드 플래시 등 메모리 분야는 세계 1위지만, 반도체 설계·위탁생산(파운드리)·첨단 패키징 등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분야가 허약해서다.
최근에는 메모리 중심의 한국 반도체 산업 구조가 더욱 좁아지는 형세다. 바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때문이다. 인공지능(AI) 필수 메모리로 꼽히는 HBM 역시 우리나라가 1위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시장 9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주력으로 쓰는 HBM이 SK하이닉스 제품이다.
증권가에서는 작년 한해 SK하이닉스 전체 매출 비중 가운데 HBM이 약 20%대로 본다. AI 수요에 맞물려 존재감이 급격히 커졌다. 그렇다면 나머지 80% 시장은 어떨까. HBM 호황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다. 일반 서버와 스마트폰·PC용 메모리 시장이다.
서버 시장은 AI가 잠식하고 있다. 수많은 데이터센터가 AI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 예산을 투입 중이다. 비싼 AI 반도체에 AI 서버 가격도 만만치 않다. AI 서버 투자 확대로 일반 서버를 향한 지출은 제한적이다. 정보기술(IT) 기업 예산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HBM 외 서버용 메모리 시장 또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스마트폰과 PC 시장은 성장이 지속 둔화되고 있다. 대대적인 혁신 없이 이같은 스마트폰·PC 시장 정체는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메모리 업계는 AI 스마트폰이나 AI PC 시장의 개화만을 바라고 있다.
이미 전방 산업 위축에 따른 타격이 가시화되고 있다. 스마트폰·PC 등 범용 메모리 성과는 점점 약화되지만, HBM이 이를 상쇄한 것 뿐이다. HBM 선두를 달리는 SK하이닉스는 그나마 수익을 거두지만, 그렇지 못한 삼성전자는 메모리 시장 변화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경쟁 상황도 녹록하지 않다. 중국의 대대적인 범용 메모리 투자로, 시장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범용 메모리를 팔아도 수익을 크게 못 거둔다는 의미다. 미국 지원을 힘입은 마이크론도 급성장 중이다.
그렇다면 HBM은 '영원한' 우리의 먹거리가 될 수 있을까. 이 또한 불투명하다. 지금 AI 업계 최대 과제는 비용과 전력 소모다. HBM을 탑재하지 않은 AI 반도체 칩 개발이 한창인 이유다. 최대한 저비용·저전력으로 AI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대안'을 찾고 있다.
당장 HBM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거 같지만, 안주해서는 안된다. 2019년 정부가 △파운드리 세계 1위 △팹리스 점유율 10% △일자리 2만7000개 추가 창출을 골자로 한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을 발표한 것도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 구조를 시스템 반도체까지 넓혀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실현 목표 기간을 5년(2030년) 남겨 둔 상황인데, 한국 파운드리 점유율은 더 떨어졌고, 팹리스 성장도 정체돼 있다.
이제 HBM에 가려진 '위기'와 대면할 시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메모리에만 집중된 산업 구조가 아니라 HBM에만 집중된 산업구조로 바뀔지 모른다. 균형있는 반도체 전략 마련과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한국 반도체 입지가 안전하지 않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