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우리 사회는 '전기차 포비아'라는 전례 없는 공포와 마주해야 했다. 당시 정부의 스마트 제어 충전기 보급 정책은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긴급 처방으로 수립됐다.
일각에서는 배터리 충전량을 물리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고, 당시 충전량이 낮을 때 화재 발생이 비교적 덜하다는 일부 통계가 이를 뒷받침하는 듯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보면 충전기 입장에서 전기차 화재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기술적으로 충전기는 차량이 요구하는 대로 전력을 공급하는 매우 수동적(Passive)인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화재 안전은 더 안전한 배터리를 제조하는 동시에, 화재 발생 시 지하주차장의 소방 설비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데 있다. 실제로 2024년 소방청 국립소방연구원이 발표한 실증 실험 결과에 따르면, 지하주차장 상부 스프링클러만 정상적으로 작동해도 인접 차량으로의 화재 전파를 차단, 일반 내연기관차 화재와 큰 차이 없이 진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굳이 비용이 더 드는 '스마트 충전기'여야 하는가? 일각의 오해처럼 배터리 충전량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마트 충전기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전력 공급 장치를 넘어 차량과 전력망이 지능적으로 소통하는 '연결'에 있다.
우선, 당장 전기차 사용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혜택부터 크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지갑에서 여러 장의 회원 카드를 꺼내 태깅할 필요 없이 충전기를 차량에 꽂기만 하면 인증과 결제가 자동으로 이뤄지는 '플러그 앤드 차지(PnC)' 환경이 구축된다. 사용자 편의성이 대폭 개선되는 것이다. 나아가 더 중요한 국가적 과제는 바로 미래의 '전력망 관리'다. 흔히 전기차가 급증하면 국가 전체의 '발전' 용량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하지만, 진짜 치명적인 병목 현상은 '배전', 그 중에서도 개별 건물과 아파트 단지에 할당된 '수전 용량'의 제약에서 발생한다.
한국교통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평균적인 충전 패턴을 고려할 때 충전기(완속) 1기당 전기차 2대(2대 1 비율)가 가장 적정한 인프라 비율이다. 즉, 전기차 보급률이 20%에 도달하면, 이를 감당하기 위해 전체 주차면의 최소 10%에는 충전기가 설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국의 많은 아파트와 건물의 여유 수전 용량이 주차면 10% 수준의 충전기를 설치하면 포화 상태에 이른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전기차 보급률이 20%를 넘어서는 순간 충전기를 더 달고 싶어도 건물에 들어오는 수전용량이 부족해 달 수 없는 물리적 한계, 즉 '인프라 절벽' 상황에 직면하는데, 현재 추세대로라면 2030년을 전후해서 이 시점이 다가올 것으로 예측된다.

더구나 현재 검토 중인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중단이 현실화되면 소비자는 그보다 최소 5년 앞서 전기차로 급격히 이동할 것이다. 2030년부터 본격화될 전기차 수요 폭증과 이에 따른 전력(수전) 대란을 막을 유력한 대안은 '스마트 그리드', 그 중에서도 양방향 충전(V2G) 기술이다.
V2G가 실현되면 전기차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움직이는 에너지저장장치(ESS)가 되어 전력망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다. 소비자들도 V2G에 참여하면 충전요금을 할인받는 등 여러 혜택이 주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장시간 주차하며 계통과 연결되어 있는 완속 충전기가 V2G의 핵심 거점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현재 보급되는 스마트 충전기들은 대부분 잠재적으로 V2G가 가능한 인프라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완속 충전기에 이 정도 규모로 전력선 통신(PLC) 모뎀을 탑재하여 V2G 준비를 마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고 오히려 글로벌 스탠더드를 최전선에서 선도하는 행보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최근 전기차·충전기에 V2G 탑재를 의무화할 수 있는 법안(SB 59)을 통과시켰다. 유럽연합(EU) 역시 당장 내년부터 신규 설치되는 모든 완속 충전기에 양방향 통신 국제표준(ISO 15118-20) 지원을 법으로 의무화했다.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막대한 규모의 테스트베드를 미리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전력망은 국가의 기간 인프라다. 당장의 비용 효율성만 따질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 측면에서 최근 정부가 제조사의 자격을 엄격히 검증하고, 국내 산업 기반이 튼튼한 기업을 선별하여 충전기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정책을 개편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환영할 만한 조치다. 이는 무분별한 저가·수입산 경쟁을 지양하고, 이렇게 갈고닦은 기술력을 확보한 국내 제조업이 향후 해외로 진출하는 데에도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비록 정책 수립 초기, 전기차 포비아 등으로 시간에 쫓겨 정부와 업계, 소비자 간의 소통이 미흡했던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방향성은 틀리지 않았다. 미래 전력 인프라의 안보 관점에서는 현 스마트 충전기 보급 정책을 흔들림 없이 지속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제조사는 더욱 고도화된 기술력과 품질로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아울러 충전 사업자도 일부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경쟁은 지양하고 소비자 편의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서비스 모델을 발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결국 스마트 충전기는 단순한 기계 장치를 넘어, 다가올 인프라 절벽을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생태계를 구축하는 핵심 연결고리다. 대한민국이 이 거대한 전환의 시기를 기회로 삼아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의 진정한 '게임체인저'로 도약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우리의 선제적이고 발 빠른 투자가 훗날 전력망 안보를 지켜낸 가장 훌륭한 백년대계(百年大計)로 평가받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훈 에바 대표이사 ceo@evar.co.kr
〈필자〉 이훈 에바 대표이사는 2000년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15년간 재직하며 정보통신(IT) 등 기술 분야에서 폭넓은 실무 경험을 쌓았다. 삼성전자 사내벤처 프로그램으로 세계 최초 전기차 자동충전 자율주행로봇을 개발한 뒤 2018년 전기차 충전 솔루션 전문기업 에바(EVAR)를 분사창업했고, 현재까지 대표이사로 기업을 이끌며 창업 이후 누적 충전기 출하량 5만대를 돌파했다. 기술 혁신과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표창, 지난해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연이어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