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다. 전 세계 D램 공급량의 3분의 2를 한국이 공급하고 있다. 낸드플래시 역시 점유율이 세계 절반을 넘는다. 한두 해를 빼고 반도체가 지난 20여 년간 수출 품목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불안하다. `사상누각`이란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기초가 약하다는 것이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와 장비의 해외 의존도가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경향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장비 국산화, 여전히 지지부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조사 결과, 올해 국내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외산 제품 비중은 70%에 이를 전망이다. 금액으로는 81억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9조원에 달한다. 반면 국산 장비는 34억달러(약 3조7000억원)에 그칠 것으로 조사됐다. 비중으로는 작년과 같은 수준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 반도체 장비 수입 비중이 80%에 육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정 수준 개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입 비중이 여전히 높다. 70% 이하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반도체 공정은 약 300단계로 구성된다. 원재료인 웨이퍼를 개별 칩(chip)으로 분리하는 단계를 기준으로 크게 △전(全)공정 △후(後)공정 △검사로 나뉜다. 각 공정별로 전문화된 장비가 필수다. 장비 가격은 전공정 20억~50억원, 후공정 5억~20억원, 검사 5억~25억원 수준이다. 가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전공정은 미세화 기술 등 반도체 칩의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노광기, 증착기, 식각기 등 전공정 장비는 매우 높은 기술 수준을 요구한다.
특히 전공정 장비에서는 전통적인 반도체 강국인 미국, 일본 업체들이 강세를 보인다. 이들 업체들은 산업 초창기부터 축적한 원천 기술을 꾸준히 개선하며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장비업체들은 원천 기술에서 취약하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국내 업체들이 전공정보다는 기술적인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후공정 및 검사 장비에 집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전공정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84%에 이르는데, 전공정에서 국산화가 미진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악순환` 우려
최근 반도체 업계에는 차세대 공정 기술 개발이 화두다. 10나노 공정 진입을 위한 극자외선(EUV) 노광기 개발과 450㎜ 대구경 웨이퍼 공정에 대비한 기술 개발에 대규모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450㎜ 웨이퍼 공정은 현재 주력인 300㎜에 비해 칩 생산성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최근 삼성전자·인텔·TSMC가 네덜란드 노광기 업체인 ASML 지분을 인수하고, 대규모 연구개발 자금을 투입한 것도 새로운 공정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차세대 공정을 성공적으로 개발하려면 반도체 기업들과 핵심 장비 업체들의 공조는 필수다. 앞으로 선발 기업 간 이 같은 추세는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핵심 전공정 장비 시장을 장악한 해외 업체들의 지배력 강화를 낳는 반면 국내 장비 업계에는 사업 참여의 기회가 제한되고 경쟁력 약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빈익빈 부익부다.
이치우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팀장은 “국내 반도체 전공정 장비 시장은 81억달러로 단일 국가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며 “그럼에도 국산 장비 업체들은 경쟁력이 약화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경쟁력 확보 방안은
사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외산 장비 의존은 불가피하다. EUV 노광기는 물론 식각기, 화학증착기, 측정장비 등 전공정 장비 부문에서 국산 장비 업체들의 원천 기술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형준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장비 업계는 램리서치와 노벨러스시스템즈 간 합병처럼 규모의 경제를 확보한 소수의 기업만 살아남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기업들은 니치마켓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화된 장비들로 실력과 체력을 쌓고 글로벌 선두 업체들과 사업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반도체 기업과 장비 업체 간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고석태 케이씨텍 회장은 “소자 대기업들이 필요한 공정 기술을 국산화하고 국내 장비 업체들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기술 정보를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업체들은 반도체 공정 로드맵조차 알 수 없어 차세대 장비 개발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또 장비 업체들도 스스로 과감한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선진 글로벌 업체를 따라가는 전략에서 이제는 앞서가는 `퍼스트 무버` 전략으로 바꿔야 한다”며 “장비 업체 스스로가 더 투자를 해서 최초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한국반도체산업협회)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