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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창립기념식. 경상현 초대 소장이 ETRI 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는 인삿말을 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이동통신과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이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연구개발(R&D) 주춧돌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놨다. 먹고살기 빠듯하던 1980년대만 해도 개별 기업이,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수백억원씩을 R&D에 쏟아붓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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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RI가 출범되기까지의 과정을 나타낸 그림.

당시 기업들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신기술 개발이 필수였다. 정부가 수출전략 품목과 관련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출연연 특정연구사업을 시작한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1980년대 초반 삼성이 세계 세 번째로 개발해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64K D램이나 전화기 1가구 1대 시대를 연 시분할전전자교환기(TDX-1), 교육용컴퓨터 국산화 등의 초석을 모두 ETRI가 놨다.

ETRI는 우리나라 IT R&D 역사 그 자체다. 1980년 출연연구기관 16개가 9개로 강제 통폐합됐지만, ETRI는 1985년 그와는 별개로 연구원 필요에 따라 스스로 통폐합했다. 전기와 전자, 통신의 진화가 통합형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4개 기관 합쳐 출범=ETRI는 연구소 4개가 합쳐진 초대형 출연연구기관으로 출범했다. ETRI는 2012년 현재 연간 예산 6000억원에 R&D 인력이 2000명을 넘는 국내 최대 IT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1976년 설립된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KERTI)와 이듬해 출범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1981년 정부방침에 따라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로 통폐합됐다. 반도체 설계와 집적회로, 반도체 소자 연구를 하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는 차관 제공자였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반대로 4년간 따로 유지하다 1985년 3월 26일 KETRI와 최종 통합하고 이름을 전자통신연구소(ETRI)로 지었다. 국내 출연연구기관 가운데 `K`자(Korea)가 안 들어가는 기관명은 ETRI가 유일하다. 애초부터 글로벌 연구기관에 걸맞은 작명을 한 것이다.

통합 기관 초대소장으로는 정보통신부 초대장관을 지낸 경상현 박사가 맡았다. 경 소장은 통합에 반대하던 IBRD를 설득하기 위해 2m가 넘는 장문의 텔렉스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경 소장이 IBRD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감동한 IBRD가 통합을 인정한 상태였다고 한다.

통합 당시 산업 상황은 컴퓨터와 통신, 반도체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하이테크 혁명으로 일컬어지던 반도체와 컴퓨터, 통신기술은 상호 결합을 통해 첨단기기와 소프트웨어 산업 구조로 급격하게 전환했다.

국내 IT업계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IBRD의 반대로 각자도생하던 기관 통합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연구주체들이 스스로 통합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KTRI는 전화보급 증가에 따라 대용량 교환기 개발 등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KIET는 IBRD로부터 차관 2900만달러를 받아 반도체 소자 개발이 한창이었다.

첫 통합논의는 1977년 말 상공부에 의해 제기됐다. KIET는 상공부, KTRI는 체신부, KERTI는 동자부 소속이었다. 체신부 등의 맹렬한 반대로 빛은 못 봤지만 1980년 KETRI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전자 및 통신분야 연구예산이 한국전기통신공사 출연금으로 충당하는 방안이 검토되면서 재통합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1984년 12월엔 경제장관협의회 의결에 따라 KETRI와 KIET 통합이 공식화됐다.

당시 KIET는 통합에 대비해 대덕에 있던 KETRI 옆에 용지 16만㎡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ETRI 등기상 설립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ETRI는 1985년 3월 26일 대전지방법원에 전두환 대통령을 설립자로 설립등기를 내고 그해 5월 정식 출범했다.

초대 소장은 한국전기통신공사 제2부사장에 이어 KETRI 소장을 하던 경상현 전 정통부 장관이 맡았다. 이사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이던 이우재 전 체신부 장관과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이 각각 임명됐다.

통합 전 KETRI는 백영학 박사, KIET는 김정덕 전 한국과학재단이사장이 맡았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는 크게 3세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세대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컴퓨터, 통신, 반도체 분야 연구를 개별적으로 이끌어온 KIET, KTRI, KERTI 등이 활동하던 시대, 제2세대는 1981년부터 1985년 초까지 활동하던 KETRI와 KIET 시대, 제3세대는 세계 정보통신(IT) 시장의 헤게모니를 갖기 시작한 ETRI 출범 이후 시대로 나눌 수 있다.

ETRI는 이후 다른 출연연구기관과는 달리 IMF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현재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다만, 소속은 1992년 과기처에서 체신부, 1995년 다시 정보통신부, 2008년 지금의 지식경제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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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구 소암시스텔 회장(당시 TDX 개발단장)

◆ 박항구 ETRI TDX 개발단장(현 소암시스텔 회장)

“당시 국제적인 상황으로 볼 때 통신장비에 필요한 반도체나 컴퓨터 기술은 자립이 절실했습니다. 자립 없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85년 5월 한국전기통신연구소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를 합쳐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출범할 당시 경상현 초대소장 밑에서 전전자교환기(TDX) 개발단장을 맡았던 박항구 소암시스텔 회장의 ETRI 탄생 소회다.

당시 박 회장은 TDX 개발단 하드웨어 개발부장으로 있다 양승택 TDX 단장이 한국통신기술 사장으로 발령 나자 그해 6월부터 TDX 단장을 맡았다.

박 회장은 “국제적인 상황으로 볼 때 기관 통합은 연구소 대형화 추세에 맞는 일이었다”며 “통신기술 자립과 세계 정상의 연구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술회했다.

“기업이 수행할 수 없는 대형 과제 추진이 통합기관의 목표였습니다. TDX만 해도 1982년부터 1986년까지 매년 300명씩 연인원 1500명이 총 240억원을 집행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 정도 예산을 투입할 배짱이 있었던 것이죠.”

당시 구미 쪽에서 흡수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반발이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사건이라는 게 이 박 회장의 생각이다.

박 회장은 당시 시너지 효과의 사례 하나를 들었다.

“TDX에 쓰이는 주문형 반도체(ASIC) 칩을 개발해야 하는데 마침 통합했던 구미 조직(반도체 연구단)이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정보가 파악됐습니다. 자체 개발하고자 마음먹으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쌓인 노하우가 없어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일을 떠맡겼죠.”

박 회장은 당시 사건을 현재 논의되는 출연연구기관 지배구조(거버넌스)에 비춰 한마디 거들었다. 그 당시 기관 통합은 두 기관만의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사건인 데 비해 지금의 거버넌스 논의는 출연연 전체를 거론하는지라 성격 자체를 달리해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정부의 잘해보려는 의지는 평가했지만, 대체로 `헛발질`이 많아 보인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ETRI 위상과 역할에 대해선 모양새보다 내실 있는 지원과 결과 산출을 요구했다. ETRI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국가적, 사회적으로 센세이셔널한 참신한 대형 결과물을 자꾸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현재는 너무 연명 위주의 액션이 많은 듯합니다. 모험이 필요할 땐 과감히 해야죠.”

박 회장은 마지막으로 “중소기업이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한편 박 회장은 1997년 9월 현대전자 통신사업부문장을 거쳐 부사장까지 지냈다. 현대전자에서 CDMA이동통신시스템 및 단말기사업 등을 총괄했다. 2001년 7월에는 CDMA이동통신시스템사업 부문 분사 방침에 따라 직원 600명을 이끌고 현대시스콤을 설립했다. 2004년 12월 현대그룹에서 현대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말도록 요청함에 따라 현재의 소암시스텔로 사명을 변경하고 회장직을 맡고 있다.


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