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기업]`가을의 전설`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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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을 삼성전자 칸 감독

 지난 4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백사장.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결승 4세트, 삼성전자 칸의 에이스 송병구와 르까프 오즈의 에이스 오영종의 맞대결의 현장. 초반 불리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병력을 모은 송병구의 마지막 공세가 불을 뿜었다. 부산 광안리 해변을 가득 메운 7만 관중은 숨을 죽였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 오영종은 항복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송병구 선수가 웃통을 벗고 생수통 물을 몸에 끼얹는 세리머니를 벌이며 선수·관중들과 첫 우승의 기쁨을 나누는 한편에선 삼성전자 칸 김가을 감독(30)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롤플레잉게임과 전략 게임을 너무 좋아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심즈’ ‘페르시아의 왕자’ ‘시저’ 등의 명작 PC 게임 시리즈를 모두 정품으로 사 모은 소녀. 대학에 진학해선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해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의 길에 들어선 그 소녀는 이제 e스포츠계 최연소 감독으로서 e스포츠 최고의 무대인 프로리그 광안리 우승의 꿈을 이뤄냈다. 바로 김가을 삼성전자 칸 감독이다.

 ◇“우리는 강하다”=“우리 팀은 강하다고 생각했고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가을 감독의 말이다. 삼성전자 칸은 지난달까지 펼쳐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지난 4일 광안리에서 펼쳐진 전기리그 결승전에서 르까프 오즈를 세트스코어 4:0으로 완파하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리란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눌렀다.

삼성전자 칸은 2000년 설립된 프로게임단 원년 멤버. 하지만 2005년 후기리그에서 준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그닥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한 만년 중하위권 팀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SK텔레콤 T1이나 KTF매직엔스 등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지켜보며 묵묵히 선수들을 키워왔다. 그래서 이번 우승이 더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김가을 감독은 “광안리에서 우승했을 때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오히려 담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광안리 결승 후 인터뷰에서 소감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물기가 배어 있었다.

 ◇기본기를 탄탄히=김가을 감독은 2003년 잘 나가던 선수 생활을 접고 삼성전자 칸 감독으로 부임했다. e스포츠 최초의 여성 감독, 최초의 프로게이머 출신 감독, 최연소 감독이었다.

 “잘 몰라서 겁없이 덜컥 맡았죠. 지금이라면 절대 감독직 맡지 않았을 거예요.”

 인기 스타도 별로 없는 조용한 팀을 강팀으로 키우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졌다. 삼성전자 칸의 팀 컬러가 스타 선수를 영입하기 보단 아마추어 선수를 키우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 기업 마케팅보단 e스포츠 문화를 닦는 역할에 더 무게를 두어서다.

 실제로 지금 삼성전자의 주력인 송병구·이성은·허영무 선수 등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김감독이 키워 온 선수들이다. 그가 선수를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 ‘기본기’와 ‘근성’이다. 김감독은 “아마추어는 프로에 비해 당연히 운영에서 뒤진다”며 “기본이 얼마나 충실한지를 본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스타크래프트’ 선수의 기본기는 1분 동안 게임상에 등장하는 유닛에 내리는 명령수를 나타내는 ‘APM’(Action Per Minute)과 효율적 게임 운영을 위한 단축키 지정을 뜻하는 ‘넘버링’, 물량 생산과 화면 전환 등이다.

 또 하나를 꼽는다면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다.

 올해 개인리그 양대 4강에 프로리그 에이스로 활약한 송병구 선수도 지난해엔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2005년 혜성같이 등장해 승승장구하다 급작스레 빠진 슬럼프였다. 마음이 위축되면서 플레이도 방어적으로 변했다. 김감독은 “송병구 선수는 슬럼프에 허덕일 때도 ‘나는 할 수 있다’ 믿으며 연습에 열중해 올해 화려하게 부활했다”며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의지가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할 수 있다’는 마인드콘트롤과 함께 전략이 변화하는 트렌드를 읽어내는 것이 슬럼프 극복의 비결이란 것이 그의 충고다. ‘길이 아니다’ 싶을 때엔 과감히 포기하는 결단도 필요하다.

 ◇여성 게이머보단 게이머 출신 감독=젊은 여성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김감독을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여성 감독’보다는 최초의 ‘프로게이머 출신 감독’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그는 “여성이 게임계에서 소수인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소수자 문제는 어디에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감독은 “여성이라서 내가 감독으로서 더 잘 하거나 못하는 것은 없다”며 “반면 게이머로서의 경험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또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노하우 등을 선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이 많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e스포츠라는 전에 없던 분야에서 활동하며 느끼는 불안을, 그는 이해한다. 김감독은 팀 운영도 자율적이다. 큰 틀의 가이드라인만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는 최대한 선수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스케줄과 사생활 등을 엄격히 통제하는 다른 게임단과는 다른 모습이다. 프로인 만큼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해야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팀의 리더로서 그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좋은 팀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선의의 내부 경쟁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내면서도 때론 선수들과 명확한 선을 긋기도 한다.

 “이번 우승은 시작일 뿐”이라며 “e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는 팀, ‘본좌 팀’으로 기억되는 팀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40, 50세가 되어서도 계속 감독을 하며 e스포츠계를 지킨다는 게 그의 의지다.

한세희기자@전자신문, hahn@

[김가을 삼성전자 감독 약력]

△1997년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 입학 △2000년 배틀탑 스타크래프트 여성부 우승, 국가 대표 선발전 스타크래프트 여성부 우승, KBK 국제 마스터즈 대회 여성부 우승, 온게임넷 롯데리아배 여자부 우승 △2001년 삼성 디지털배 KIGL 여성부 우승, iTV 서바이벌 리그 우승, 스카이 겜티비 여성부 특별전 우승, 온게임넷 킹덤 언더 파이어 특별전 우승 △2002년 스카이 겜티비 특별전 우승 △2003년 삼성전자 칸 감독 취임 △2005년 Kespa컵 우승 △2006년 스카이 프로리그 후기리그 준우승 △2007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우승,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감독상 수상 △현재 삼성전자 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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