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면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이므로 한글의 정보화를 앞당겨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고 우리말의 세계화를 이룩하자`는 자긍심을 고취하는 일이다. 동시에 ‘중차대한 한글 정보화가 지지부진해 매우 걱정스러우며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반드시 뒤따른다. 560돌을 맞은 올해도 21세기 ‘세종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걱정과 휴대폰 입력방식 표준 경쟁이 가열되고 있어 표준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정보사회 건설을 기치로 내건 야심찬 국가 프로젝트인 세종계획의 문제점이나 휴대폰 한글 입력방식은 몇년 전부터 수차례 논쟁이 있었지만 여전히 별 진전이 없는 모양이다. 특히 세종계획은 국어 정보화 관련 업체가 대부분 도산해 기반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처럼 국어 정보화에 대한 담론은 거창한 구호만 난무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빈약성을 면치 못하면서 답보상태를 반복하는 실정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보급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국어 정보화에서 이룩한 뚜렷한 실적이나 진전은 그리 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의 국어 정보화 최대 공적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전 세계에서 몇 안 되게 ‘아래아한글’이라는 우리 고유의 문서편집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 표준 문자세트인 유니코드에 중국 한자 다음으로 한글이 많은 영역을 할당받았다는 정도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민간에서 이룩한 업적이다. 아래아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돼 사라지기 일보 직전에 민간이 앞장서 지켜냈으며 유니코드에서 한자 다음으로 많은 한글 문자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찬진 사장을 비롯한 민간의 억척스런 활동 덕분이었다.
그동안 정부가 무엇을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국어 정보화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정부의 이해부족으로 인한 구체성과 실용성 결여, 명확한 원칙 및 전략 전술의 부재로 인한 정책 혼란이 그것이다. 세종계획만 하더라도 사업 목표 중 하나가 ‘세계 수준의 국어 기초언어 자료 기반 구축을 통한 우리말 정보화’일 정도로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개별 사업내용에서도 전자사전 개발 외에는 국어 고유의 연구사업인지 국어 정보화 사업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정책 혼선의 대표적 사례는 90년대에 이뤄진 한글코드 표준화다. 정부가 ‘한글의 특성을 컴퓨터에 가능한 한 완벽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도, ‘기술발전에 따른 문제해결 가능성’도 무시한 채 섣불리 완성형을 표준화해 반발을 샀다. 결국 조합형이 복수 표준으로 채택됐지만 곧이어 완성형과 조합형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한 유니코드의 등장으로 논쟁이 매듭지어졌다.
‘기술 진보에 따라 더욱 완벽한 언어특성 반영 가능성’이라는 원칙과 이를 고려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전략·전술 채택은 지금도 유효한 명제다. 휴대폰 한글입력 방식 표준화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휴대폰도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계속 진화하고 있어 입력방식 또한 휴먼인터페이스 기술 발달과 함께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섣불리 표준화를 할 수도, 지금처럼 표준화를 계속 미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지나치게 포괄적인 목표를 내세운 21세기 세종사업도, 휴대폰 한글 입력방식 표준화 문제를 기술발전이 해결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자세도 국어 정보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술발전 가능성을 고려해 진화론적 측면에서 현 단계에서 바람직한 결과물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제한된 시간에 구체적인 결실을 얻도록 하는 일이다. 리눅스처럼 만족스럽지 않지만 기술 개방적인 결과물을 실제로 만들어내고 이를 기술발전 추세에 따라 하나하나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답보상태에 머문 국어 정보화의 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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