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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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한국EDPS공사 직원들과 사무실에서 자리를 함께한 필자(앞줄 오른쪽부터 세번째)

(5)깨달음의 일본 비즈니스

 일단 귀국을 현실적으로 고려해 보니 한국에 들고 갈 나 만의 경쟁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미국에 유학 와서 고생하며 공부하고 IBM에도 근무했는 데 빈손으로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기때문이다.  나는 생각 끝에 미시간대학 시절 은사인 애클리 교수에게 부탁, RCA라는 컴퓨터 독점 판매권을 얻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의견을 타진했다. RCA는 IBM 만큼 유명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미국 내에서는 나름 대로 인지도가 있는 컴퓨터였다. RCA는 나에게 대형 리무진까지 뉴욕으로 보내 내 제안에 적극 호응했고 나는 총판점 계약시 커미션을 유리하게 조정, RCA와 계약서에 사인했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세종로 처갓집을 주소지로 ‘한국EDPS공사’란 회사를 설립했다. 우선 처가 쪽 친척을 연으로 해 서울시청·체신부·한전·철도청·경제기획원 등 5개 기관을 대상으로 영업에 나섰다. 그런데 당시 RCA 컴퓨터의 가격은 대당 100만 달러로 한국정부는 다섯 대 분에 달하는 500만 달러의 미화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 쪽에서는 달러 대신 넉넉한 엔화 결제를 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H사였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 RCA와 제휴관계를 맺을 때 RCA 컴퓨터를 현지조립 방식으로 생산하며 아시아 지역 판매도 담당했던 H사를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H사로부터 기계를 들여올 생각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일본 H사의 반응은 우왕좌왕이었다. 사장과 상무는 RCA와 H사의 주종 관계를 생각한 탓 인지 RCA의 체면을 봐서라도 협상을 진행하려 했다. 그렇지만 일본 H사의 한 실무자는 자본금도 200만원에 지나지 않고 사무실도 처갓집 주소인 나를 신뢰하지 못했고 ‘공화당에 알아보니 컴퓨터를 도입할 공식 계획도 없다’고 하며 나를 사기꾼 취급했다.

 나는 신용장을 개설하기때문에 수출시 손해를 입지 않는다고 설득했고 H사는 일본인다운 결론을 내렸다. 즉, 이 거래를 완전히 거절할 수는 없으니 ‘계약을 하되 구속력이 없다’는 내용을 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들은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나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그때 나는 “아닙니다. 이번에 저도 일본 회사와 사람, 사회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 저는 일본 회사와 거래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거절했다.

 “비즈니스란 어차피 위험 부담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H사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자세가 없더군요. 사실 이번 거래가 잘 됐으면 H사에 엄청난 기회가 되었을 겁니다. 향후 한국 시장 전체를 먹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 거래에서 나도 어차피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사소한 위험 요소 때문에 이런 기회를 박찬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회상컨데 나는 그때 일본을 배우고 비즈니스를 배웠다. 내가 사업 출발 단계부터 그렇게 큰 돈을 쉽게 손에 쥐었다면 우선 인간적으로 망가지기 쉬웠을 것이며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H사가 한국의 컴퓨터 시장을 초기에 장악했다면 그 후유증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저런 문제를 따져보면 그때 H사와의 거래가 무산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안수민기자@전자신문, s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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