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10대와 20대를 타깃으로 한 게임포털 전략은 적중해 회원수가 어느새 100만명까지 돌파했고 이때부터 대박 마케팅을 꿈꾸며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1999년 겨울, 인터넷 영화관을 운영하던 아이링크커뮤니케이션의 이사로 있을 때였다. 평소 잘 알던 지인을 통해 한 게임업체가 문을 닫게 되었다며 도움을 청해 왔다. 여러 번의 요청을 받은 끝에 한번 회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회사의 게임개발자들의 열정과 개발력은 높이 살 만했으나, 당시 내가 재직하던 회사가 투자를 받으며 한창 커가고 있던 터라 그다지 많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만 개발자들의 열정이 아쉬워 주변의 엔젤 투자자를 모아주는 차원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이것이 2000년 3월 넷마블이 설립된 시발점이었다. 나는 지분도 없었고 근무도 하지 않았지만, 엔젤투자자들의 요청에 의해 사외이사로 이름을 걸어놓았다.
넷마블이 설립된 지 얼마 안되어 벤처 거품이 제거되면서 벤처들이 하나 둘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넷마블도 예외는 아니어서 설립 자금을 거의 소진한 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됐다. 나를 믿고 그 회사에 설립 자금을 지원한 엔젤 투자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때 넷마블 식구들로부터 CEO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다른 벤처회사의 CEO로 내정돼 있던 터라 난감했다. 첫 번째 결단의 순간이 돌아온 것이다. 나를 믿고 투자한 엔젤들과 순수한 개발자들에 대한 애정이 나의 발길을 넷마블로 돌리게 했다. 그 해 10월 넷마블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대작 온라인게임을 개발하고자 하는 개발자들을 설득, 단기간에 개발해 유료 수익을 낼 수 있는 보드게임 개발 방향으로 선회했다. 물론 그 당시 보드게임 분야에서는 선발업체인 한게임과 엠게임이 시장의 90%를 과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틈새시장을 공략, 10대와 20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해 그들의 입맛을 제대로 맞춘다면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일종의 믿음이 있었다.
여러 날 밤샘 작업을 거쳐 그 해 11월 드디어 넷마블 사이트를 오픈했다. 사이트 디자인은 최대한 단순하면서 동심을 자극할 수 있는 원색을 이용했다. 가능한 한 세련돼 보이려는 다른 사이트와 차별되면서 쉽게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의 색깔을 잡아 사용자들이 접근하기 쉽고 편안한 사이트를 만들겠다는 게 컨셉트였다. 여기에 ‘배틀가로세로’ ‘퀴즈마블’ 등 교육용 게임과 ‘테트리스’ ‘알까기’ 등 캐주얼 게임을 내세워 쉽게 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청소년층과 여성 유저들을 끌어들였다.
전략은 적중했다. 청소년들이 하나둘씩 넷마블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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