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 드러낸 미국 디지털 지상파 TV방송 방식

오는 11월 개시되는 미국의 디지털 지상파TV 방송과 관련, 최대 관심사인 ABC, CBS, NBC, 폭스TV 등 4대 네트워크의 방송방식이 이달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전미방송사업자연맹(NAB) 전시회에 맞춰 일제히 공개돼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NBC와 CBS가 주사선수 1천80에 표시방식이 비월차주사선(인터레이스트)방식인 「1080I」를, ABC는 주사선수 7백20에 순차주사선(프로그레시브)방식의 「720P」를, 폭스TV는 주사선수 4백80의 프로그레시브방식 「480P」를 각각 선정한 것이 그 뼈대다.

이는 실질적으로 4대 네트워크가 고화질을 지향하는 부류(NBC, CBS)와 PC와 친화적인 부류(ABC, 폭스TV)로 양분됨을 의미한다.

미국의 지상파 디지털방송은 지난해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규격 일원화 단념으로 방송업계가 복수(18개)의 방송방식 중 자율적으로 선정한 방식을 갖고 경쟁하게 되는 이 나라 방송사상 초유의 상황을 만들어내 관심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모은 것은 4대 네트워크의 움직임으로 구체적으로는 이들의 방송방식이 현행 방송의 연장선 상에서 「고선명(HD)TV 방송」을 지향할 것인가, 혹은 데이터 방송을 중시하는 「PC, TV」를 추구할 것인가가 초점이었다.

특히 이 문제는 디지털 지상파방송의 주도권이 TV업계와 PC업계 어느쪽으로 기울어지느냐와 깊이 연관돼 있어 그 향배에 쏠린 관련업계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FCC의 지상파방송 디지털화 결정 이후 TV업계는 지금까지 아날로그 방송에서 채용해온 인터레이스트 방식을 내세우고, PC업계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방식으로 맞서며 서로 대립해왔다.

인터레이스트 방식은 현행 TV의 주사방식으로 한 장면에 주사선을 절반씩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 기술 노하우가 많이 축적돼있어 고화질화로의 이행이 용이한 반면 작은 문자 등은 표현하기 힘든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프로그레시브 방식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의 주사방식으로 주사선을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작은 문자를 선명하게 표시할 수 있다.

양측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지난해 4월 컴팩컴퓨터와 마이크로소프트 및 인텔 등 3개사 연합(트로이카)이 프로그레시브 방식에 근거한 「PC, TV」규격을 제창하면서부터. 이에 대해 TV업계는 기술주도권을 PC측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TV의 생명은 화질」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물론 주도권 장악을 위한 양측의 로비전도 뜨거웠다. 이 때문에 중간에 낀 FCC는 마침내 방송방식의 일원화를 포기하고 18개 방식 가운데 각 사업자가 자율적으로 선정해 사용하도록 했다.

이번 4대 네트워크의 방송방식 발표에서 눈여겨볼 점은 역시 ABC와 폭스TV의 선택, 즉 PC측이 지지하는 프로그레시브 방식의 결정이다. 다시 말해 TV측 주도자인 4대 네트워크 가운데 NBC와 CBS가 예상대로 현행 인터레이스트 방식을 선정한 데 대해 왜 ABC와 폭스TV는 지난해의 입장을 완전히 바꿔 PC쪽으로 붙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 ABC측은 『같은 주사선 수에서도 프로그레시브쪽 화면이 더 깨끗하다』며 화질 면에서의 문제가 없음을 강조, 프로그레시브 선택을 정당화하고 있다.

컴퓨터업계측의 방송업계 및 관계당국에 대한 끈질긴 로비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적된다. 폭스TV가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방송행정에 영향력을 지닌 미국 유력 의원들을 불러 프로그레시브 방식의 실험방송을 벌인 일 등은 그 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PC와 TV의 융합」이라는 미래상에 프로그레시브가 보다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지적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최대 케이블TV업체인 텔레커뮤니케이션스(TCI)의 말론 회장이 제시한 예측은 그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TV는 가족이 함께 즐기는 미디어, PC는 개인 전용으로 현재는 이용 형태가 각기 다르지만 이 기능적 차이는 디지털기술의 진전으로 곧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따라서 ABC와 폭스TV는 PC와 TV간 경계가 사라졌을 때 프로그레시브가 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디지털화에 따른 수입증대 여부도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실제로 미국 방송협회는 지상파방송의 디지털화에 총 1백60억달러 상당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반면 그에 따른 수입 증대분은 극히 미미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방송업계에는 투자회수가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ABC와 폭스TV는 광고수입과 유료채널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화질은 떨어지지만 다채널화에 보다 유리한 방식을 선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고화질」과 「다채널」 등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방송사들의 이해를 한 배에 싣고 미국의 디지털 지상파방송은 11월 개시될 예정이다.

제조업체도 나름대로의 큰 기대를 걸고 있다. TV측은 대당 7천달러를 호가하는 61인치 고화질, 대형TV의 판매확대, PC측은 TV의 대체수요를 각각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동상이몽」에 「방송 홍수시대」를 살고 있는 소비자들이 얼마나 호응해줄지는 미지수다.

<신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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