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한 때 대한민국의 가장 역동적인 드라마였다. 가난한 집안의 자녀도 공부하고 노력하면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개천에서 나온 수많은 용들은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대한민국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살아 있는 역동적인 사회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풍경이 달라졌다. 개천보다 강남의 특정 동네에서 많은 용이 나기 시작했다. 부모의 소득과 사는 곳, 사교육과 해외 경험이 자녀가 얻을 기회의 크기를 좌우하게 됐다.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교육과 경험의 격차를 거쳐 결국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회의 불평등에 국가가 답을 내놓아야 할 시점에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정부가 발표한 올해 1분기 청년 고용률은 43.5%로 코로나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쉬거나 실업 상태인 20·30대 미취업자는 171만명에 이른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2022년 하반기 이후 3년간 줄어든 청년 일자리 21만1000개 가운데 98.6%가 AI 노출도가 높은 업종이었다. 회계·법무·코딩·디자인 등 청년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해 경험을 쌓던 업무부터 AI가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AI는 공간의 제약을 낮춘다. 지방이든 서울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좋은 아이디어와 실력이 있다면 과거보다 훨씬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새로운 '개천의 용'을 만들어낼 기술이기도 하다.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공간의 장벽을 허문 AI가 자본의 장벽을 새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이른바 'AI 월세'라는 말이 나온다. 매달 얼마를 지불하느냐에 따라 쓸 수 있는 도구와 생산성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고성능 AI 도구와 컴퓨팅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청년은 자신의 능력을 몇 배로 확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청년에게 AI는 기회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 격차는 소득에서 교육으로, 이제 AI 활용 능력으로 번지고 있다. 그 결과 양극화는 '가진 것의 차이'를 넘어 '기회를 만들어낼 능력의 차이'로 확장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미 부의 격차가 기회의 격차를 낳고 있는데, AI는 청년의 취업 문마저 좁히고 있다. 정작 AI를 활용해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데도 부모의 경제력이 영향을 미친다. 이 악순환이 굳어지면 청년 취업난을 넘어 계층 이동의 통로 자체가 좁아질 수 있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이 잃게 되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노력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청년들의 믿음이다.
이제 국가가 답해야 한다. 부모의 자산과 관계없이 AI와 컴퓨팅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넓히고, 청년에게 실무와 숙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업에는 과감한 인센티브를 마련해야 한다. 공공조달과 창업 지원도 청년의 첫 프로젝트와 첫 매출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청년정책을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성장과 국가 경쟁력에 대한 투자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
AI는 앞으로 대한민국의 산업과 일자리, 계층 이동의 질서까지 바꿀 것이다. 이 거대한 전환에서 청년이 새로운 도전과 기회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AI 강국이라는 성취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게 된다. 산업화 시대의 국가는 당장의 성장과 생산성을 높이는 데 정책의 무게를 두었다. AI 시대에는 미래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건설해 나갈 세대에게 그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청년에게 다시 기회의 사다리를 놓는 것, 그것이 AI 대전환기에 넥스트 거버넌스가 세워야 할 새로운 국가 운영의 원칙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